[수필의 향기] 나를 조문(弔問)하다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10월 13일(일) 23:00 가가
공원이라서 발길을 내민다. 담양 가는 길목, 갑향공원.
표지석들이 슬픈 눈빛으로 서 있다. 승화원. 이별의 무게는 작을수록 더 무겁다. 노인보다 중년, 아이에게 내 시선은 머문다. 무슨 사연, 어떤 운명으로 여기 있을까. 죽음이 이룬 마을을 서성인다.
그 뒤 몇 차례 더 찾았다. 딱히 아는 이는 없으나 한번 낯을 익혔으니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법. 막걸리 한 잔과 한 송이 국화를 바친다. 혼자였으니 내가 마셨고 나에게 헌화가 되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취객은 더 쓸쓸하다.
내가 조문하는 고인은 대부분 생면부지다. 친구나 동료와 친하다고 해서 가족까지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선 고인보다 고인 사진 아래 쓰인 지인 이름부터 찾는다. 식장은 사자보다 산 자를 위로하러 간다.
얼마 전 조문도 그랬다. 스스로 택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물론 우리도 모른 척했다. 난 태연히 조문했다. 고인이 아니라 지인을 보러 갔기 때문이다.
난 그의 용기와 비겁 사이, 보류와 선택 사이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끝이 허무하듯 내 끝 역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화려했던 쓸쓸했던 마지막 공연은 모두 공허한 법. 시작은 불공평했을지 모르나 막장은 언제나 분명하고 공평하다. 그 위로 비가 내리고 눈이 덮이고 낙엽이 덧없이 쌓일 것이다.
장례식장에 들어선다. 지명수배자처럼 걸린 고인들의 사진을 바라본다. 마지막 3일 동안만 전시될 미술관. 화구 앞에 철거 순서를 기다리는 이들이다.
구순을 훌쩍 넘긴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시선은 나이 어린, 너무 서둘러 온 이들 앞에 머문다.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승화원에서처럼… . 그러다가 문득 마주친 숫자, 시야에 확 들어온 1963. 난 그 숫자에 놀라 동공을 박고 한참 멈칫 서고 만다. 친구, 갑장. 토끼띠, 82학번 …
저승이나 지옥에서 만나도 그 숫자 하나로 동질감을 나눴을 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이 하나, 같은 이유로 격하게 껴안는다.
그는 왜 여기 있을까. 어디가 아팠을까. 오랫동안 눈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어쩌면 순서만 바뀌었지 내가 거기 있고, 그가 나를 바라본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가 나라면 그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베이비붐 세대, 필연적인 이촌향도,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과 3김 시대를 정면으로 관통한 386세대, 개인보다 우리를 앞세운 마지막 공동체 시대. 초가지붕 슬레이트 아파트로, 집 한 칸 마련코자 애면글면 표류한 인생. 막걸리에서 소주로 그리고 소맥으로 갈아탄 비주류, 야간작업을 끝내고 귀향 열차 속에서 은하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노동자들 혁명가들 그리고 로맨티시스트들.
어느 보리밭이나 원두막에서 첫사랑을 속삭였고,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시고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으며, 산장이나 계곡에서 피로연을 했을, 추운 밤 집게를 들고 연탄을 갈고, 아파트에 입주해서 처음으로 아빠 노릇을 했을 사람. 그럭저럭 살만하니까 문득 갑자기 마주한 저승사자, 낯선 종점.
그래도 짧지는 않았다. 욕 듣지 않고 살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다지 죄 없이 애면글면 살아왔을 것이다. 배고픈 시대, 가난한 국가, 차별받은 지역, 그 속에서 생은 비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위로한다. 그런 날들을 잘 견디고 여기까지 온 그를 거듭 위로하고 또 조문한다.
영광보다도 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낸 삶, 그리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정체성에 거듭 감사하며 고생했다고 가볍게 어깨를 토닥여준다. 뜨거운 불이 잠깐 육신을 태우고, 영원한 안식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를 나 삼아 나를 조문한다. 이번 생은 개미지옥이었을지라도 다음 생은 명주잠자리로 멋지게 활공하길 바란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온다. 먹장구름이 걷히고 하늘은 높푸르고 구름은 새하얗다.
표지석들이 슬픈 눈빛으로 서 있다. 승화원. 이별의 무게는 작을수록 더 무겁다. 노인보다 중년, 아이에게 내 시선은 머문다. 무슨 사연, 어떤 운명으로 여기 있을까. 죽음이 이룬 마을을 서성인다.
내가 조문하는 고인은 대부분 생면부지다. 친구나 동료와 친하다고 해서 가족까지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선 고인보다 고인 사진 아래 쓰인 지인 이름부터 찾는다. 식장은 사자보다 산 자를 위로하러 간다.
얼마 전 조문도 그랬다. 스스로 택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물론 우리도 모른 척했다. 난 태연히 조문했다. 고인이 아니라 지인을 보러 갔기 때문이다.
구순을 훌쩍 넘긴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시선은 나이 어린, 너무 서둘러 온 이들 앞에 머문다.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승화원에서처럼… . 그러다가 문득 마주친 숫자, 시야에 확 들어온 1963. 난 그 숫자에 놀라 동공을 박고 한참 멈칫 서고 만다. 친구, 갑장. 토끼띠, 82학번 …
저승이나 지옥에서 만나도 그 숫자 하나로 동질감을 나눴을 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이 하나, 같은 이유로 격하게 껴안는다.
그는 왜 여기 있을까. 어디가 아팠을까. 오랫동안 눈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어쩌면 순서만 바뀌었지 내가 거기 있고, 그가 나를 바라본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가 나라면 그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베이비붐 세대, 필연적인 이촌향도,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과 3김 시대를 정면으로 관통한 386세대, 개인보다 우리를 앞세운 마지막 공동체 시대. 초가지붕 슬레이트 아파트로, 집 한 칸 마련코자 애면글면 표류한 인생. 막걸리에서 소주로 그리고 소맥으로 갈아탄 비주류, 야간작업을 끝내고 귀향 열차 속에서 은하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노동자들 혁명가들 그리고 로맨티시스트들.
어느 보리밭이나 원두막에서 첫사랑을 속삭였고,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시고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으며, 산장이나 계곡에서 피로연을 했을, 추운 밤 집게를 들고 연탄을 갈고, 아파트에 입주해서 처음으로 아빠 노릇을 했을 사람. 그럭저럭 살만하니까 문득 갑자기 마주한 저승사자, 낯선 종점.
그래도 짧지는 않았다. 욕 듣지 않고 살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다지 죄 없이 애면글면 살아왔을 것이다. 배고픈 시대, 가난한 국가, 차별받은 지역, 그 속에서 생은 비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위로한다. 그런 날들을 잘 견디고 여기까지 온 그를 거듭 위로하고 또 조문한다.
영광보다도 더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낸 삶, 그리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정체성에 거듭 감사하며 고생했다고 가볍게 어깨를 토닥여준다. 뜨거운 불이 잠깐 육신을 태우고, 영원한 안식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를 나 삼아 나를 조문한다. 이번 생은 개미지옥이었을지라도 다음 생은 명주잠자리로 멋지게 활공하길 바란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온다. 먹장구름이 걷히고 하늘은 높푸르고 구름은 새하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