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구석의 시간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10월 07일(월) 00:00 가가
녀석이 또 나오지를 않는다. 여느 때 같으면 쪼르릉 달려 나와 열심히 꼬리를 흔들어 주었을 텐데 오늘은 아무 기척이 없다. 큰 소리로 불러 봐도 돌아오는 건 빈 소리뿐이다. 아침에 자꾸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게 심상치 않다 싶더니 진짜 탈이라도 난 건가? 덜컥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혹시? 급히 안방으로 달려가 침대 밑을 들여다본다. 다행히 녀석이 그곳에 있다. 잔뜩 웅크린 채 나를 쳐다본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안심이 된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을 쓰다듬는다. 녀석은 잠자코 있으나 내 손길을 썩 달가워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으응, 그래 알았어. 귀찮게 안 할게. 근데 또 어디가 아픈 거야, 응?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수 없으나 안고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싹 나았으면 싶은데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녀석은 한사코 몸을 빼려는 눈치다. 사실 나도 무섭고 두렵다. 녀석이 자꾸 구석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보호하는 데는 오히려 그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나도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저렇게 외진 데로 몸을 피해 얼마쯤 웅크리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생생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내일 아침이면 틀림없이 꼬리 살살 흔들며 밥그릇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침대 밑은 녀석의 은신처다. 몸이 아플 때, 혹은 너무 지쳤다 싶을 때면 으레 찾아가 숨어 있는 장소다. 누구의 눈길도 손길도 마다한 채 오로지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처음엔 왜 구석으로 들어가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둠보다 밝음이, 혼자 있는 것보다는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래서 숨어 들어가는 녀석을 자꾸 방해했다. 몇 번을 거듭한 후에 알게 된 것은 누구나 그렇듯 녀석에게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용히 쉬고 싶은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몸이 아플 때조차 굳이 혼자이기를 고집하는지 그것만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플 때는 누군가 이마에 손이라도 얹어주면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지 않던가 말이다.
녀석은 혼자 아프고, 혼자 견디고, 그리고 혼자 일어났다. 누구에게 의존하고 짜증 부리고 그런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 게 더 안쓰러웠다. 구석으로 들어간 녀석은 용케도 다시 회복되어 나오곤 했다. 한나절, 하루, 길게는 이틀도 넘어간 적이 있지만 병원으로 가기 전 스스로 회복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내가 할 일은 그의 시간을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싸움에 지친 소가 기운을 차리기 위해 자신만의 ‘퀘렌시아’를 찾듯이 녀석도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었다. 투우사가 숨 고르는 소를 공격하지 않듯이 녀석도 어서 괜찮아지기를 빌어보는 것이었다.
구석은 은신처이자 회복의 장소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안정감과 안전, 편안함을 얻고자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곳이다. 저 녀석만 아니라 여타의 생명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공포심이 일거나 불안이나 스트레스 등의 장애를 느낄 때면 누구라도 구석으로 기어든다. 구석은 소외되고 어둡고 초라한 곳이지만, 또한 은밀하고 안온하며 위안과 휴식이 있는 곳이다. 소외와 불안, 칩거와 유폐 같은 떠밀린 자의 거소인 반면에 희망과 용기, 재생과 활력을 되찾는 전복의 장소라는 것을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리라.
오늘은 나도 잔뜩 상처를 입고 돌아온 참이다. 세상천지에 나 혼자 남겨진 듯, 모든 걸 탈탈 털린 듯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구석의 구석 내 방 책상에 앉아 ‘불멍’도 아니고 ‘물멍’도 아니고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으니, ‘살다’와 ‘견디다’가 같은 말처럼 느껴진다. 외롭고 슬픈 날도 견디고, 두렵고 불안한 날도 견디고, 길을 잃고 헤매는 날도 견디고, 견디고 견디는 게 삶인 것만 같다. 겨울을 견디니 봄이 오고, 여름을 견디니 가을이 오지 않느냐고.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고, 그 또한 지나간다고 우격다짐이라도 해야 하는가. 떠밀려온 잔해처럼 뒤엉켜 있는 밤.
문득 등 뒤로 기척이 느껴진다. 언제 왔는지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유독 반짝인다. 구석을 나와 구석을 내다보고 서 있는 저 작은 것, 저 쪼그만 강아지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덥석 껴안고 구석을 나간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수 없으나 안고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싹 나았으면 싶은데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녀석은 한사코 몸을 빼려는 눈치다. 사실 나도 무섭고 두렵다. 녀석이 자꾸 구석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보호하는 데는 오히려 그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나도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저렇게 외진 데로 몸을 피해 얼마쯤 웅크리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생생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내일 아침이면 틀림없이 꼬리 살살 흔들며 밥그릇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구석은 은신처이자 회복의 장소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안정감과 안전, 편안함을 얻고자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곳이다. 저 녀석만 아니라 여타의 생명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공포심이 일거나 불안이나 스트레스 등의 장애를 느낄 때면 누구라도 구석으로 기어든다. 구석은 소외되고 어둡고 초라한 곳이지만, 또한 은밀하고 안온하며 위안과 휴식이 있는 곳이다. 소외와 불안, 칩거와 유폐 같은 떠밀린 자의 거소인 반면에 희망과 용기, 재생과 활력을 되찾는 전복의 장소라는 것을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리라.
오늘은 나도 잔뜩 상처를 입고 돌아온 참이다. 세상천지에 나 혼자 남겨진 듯, 모든 걸 탈탈 털린 듯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구석의 구석 내 방 책상에 앉아 ‘불멍’도 아니고 ‘물멍’도 아니고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으니, ‘살다’와 ‘견디다’가 같은 말처럼 느껴진다. 외롭고 슬픈 날도 견디고, 두렵고 불안한 날도 견디고, 길을 잃고 헤매는 날도 견디고, 견디고 견디는 게 삶인 것만 같다. 겨울을 견디니 봄이 오고, 여름을 견디니 가을이 오지 않느냐고.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고, 그 또한 지나간다고 우격다짐이라도 해야 하는가. 떠밀려온 잔해처럼 뒤엉켜 있는 밤.
문득 등 뒤로 기척이 느껴진다. 언제 왔는지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유독 반짝인다. 구석을 나와 구석을 내다보고 서 있는 저 작은 것, 저 쪼그만 강아지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덥석 껴안고 구석을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