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나만의 금지곡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9월 30일(월) 00:00 가가
‘멋대로’
노래는 ‘내 멋대로’ 부를 때 가장 흥겹다. 음정 박자 없이, 혼자 신나게 부를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새가 노래하듯, 시인이 노래하듯 말속에는 노래 이상의 자유롭고 흥겨운 넉넉한 마음이 담겨 있다. 자장가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고, 잡초를 뽑으며 흥얼대는 농부의 들노래에는 신명이 들어있다. 어부들의 어기어차 소리에도 노래 이상의 기운이 느껴진다. 찬송가에는 경외감이, 풍금 소리에는 동심이 가득하다.
동물은 물론 식물도 음악을 들려주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건강하게 잘 자란다고 하니, 음악은 뭇 생명에게 영혼을 위무해주고 평화를 선물하는 만병통치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도 노래방을 찾고,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콘서트에 가기도 한다. 노래는 언제 들어도 즐겁고 행복해진다. 책이 멀리서 찾아온 좋은 벗과 같다면 음악은 늘 가까이 곁에 함께 하는 가족이다.
예전에는 금서처럼 금지곡도 많았다. 그런데 금지한 이유가 ‘제멋대로’다. 정치적이고 선동적이라는 말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아침이슬’(김민기)은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김일성을 의미한다고 금지했다. ‘왜 불러’(송창식)는 장발 단속을 피해 도망가는 영화 장면에 삽입되어서 금지했다고 한다. 심지어 ‘거짓말이야’(김추자)는 불신 풍조를 조장하고, ‘기러기아빠’(이미자)는 가사가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하다못해, ‘미인’(신중현)은 요란해서, 행진(들국화)은 가수 창법이 미숙해서 금지곡이 되었다.
학창 시절 애창곡이었던 ‘칭기즈칸’은 주인공이 공산권 국가 인물이라서, ‘보헤미안 랩소디’는 보헤미아가 당시 공산주의 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니 어이가 없다.
더 웃긴 것은 왜색이 강하다고 금지한 노래, ‘동백 아가씨’(이미자)를 청와대 만찬에서 정작 본인은 애창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그 인간성이 ‘제대로’ 드러난 셈이다.
교가나 군가, 찬송가나 찬불가 등은 목적성이 강한 의식화 노래다. 사기를 북돋아 주고 애국심과 애교심을 심어주며, 절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찬양한다. 그러나 자기 그룹에 속한 이들을 결집하고 응집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배척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게 금지를 주도했던 그들은 어처구니없게 자기들의 이념에 맞는 노래는 귀에 못 박히도록 선동적으로 보급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아마 이 노래를 정율성의 팔로군 행진곡처럼 목적성이 강한 의식화 노래라고 ‘내 멋대로’ 금지해야 한다고 하면 세상이 발칵 난리가 날 것이다.
총과 칼을 들고 서로 증오하는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자는 노래는 커다란 위안이 된다. ‘We are the world’, 손에 손잡고 등 올림픽 주제가 상당수가 만인의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다.
캄보디아 내전을 다룬 영화 킬링필드의 마지막 삽입곡 ‘이매진’도 그런 노래다. 국가도 민족도 종교도 없는 세상, 서로 편을 가르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배경음악은 오래도록 여운을 준다.
음악보다 정치적으로 악용된 예술 또한 드물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악보다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예술 또한 없다. 진짜 좋은 음악은 그 바탕에 언제나 휴머니즘을 깔고 있다.
음악은 문학과 춤과 연극과 인생이 어우러진 대서사시이다. 그래서 불꽃을 돌며 춤추는 인디언들보다 격렬하고, 사랑을 나눌 때보다 더 뜨겁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통곡보다 더 슬프고, 누군가를 유혹하는 소리보다 더 매혹적이다.
음악이 ‘내 멋대로’ 불릴 때 가장 흥이 나지만, 진정 ‘제멋대로’ 불려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금지곡은 딱 한 곡이다. 한때는 18번이었으나 지금은 나만의 금지곡,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금지 안 된 금지곡이다. 딱히 이유도 없다. 그래도 기꺼이 묻는다면, 차마 ‘내 멋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는 ‘내 멋대로’ 부를 때 가장 흥겹다. 음정 박자 없이, 혼자 신나게 부를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새가 노래하듯, 시인이 노래하듯 말속에는 노래 이상의 자유롭고 흥겨운 넉넉한 마음이 담겨 있다. 자장가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고, 잡초를 뽑으며 흥얼대는 농부의 들노래에는 신명이 들어있다. 어부들의 어기어차 소리에도 노래 이상의 기운이 느껴진다. 찬송가에는 경외감이, 풍금 소리에는 동심이 가득하다.
더 웃긴 것은 왜색이 강하다고 금지한 노래, ‘동백 아가씨’(이미자)를 청와대 만찬에서 정작 본인은 애창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그 인간성이 ‘제대로’ 드러난 셈이다.
교가나 군가, 찬송가나 찬불가 등은 목적성이 강한 의식화 노래다. 사기를 북돋아 주고 애국심과 애교심을 심어주며, 절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찬양한다. 그러나 자기 그룹에 속한 이들을 결집하고 응집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배척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게 금지를 주도했던 그들은 어처구니없게 자기들의 이념에 맞는 노래는 귀에 못 박히도록 선동적으로 보급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아마 이 노래를 정율성의 팔로군 행진곡처럼 목적성이 강한 의식화 노래라고 ‘내 멋대로’ 금지해야 한다고 하면 세상이 발칵 난리가 날 것이다.
총과 칼을 들고 서로 증오하는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자는 노래는 커다란 위안이 된다. ‘We are the world’, 손에 손잡고 등 올림픽 주제가 상당수가 만인의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다.
캄보디아 내전을 다룬 영화 킬링필드의 마지막 삽입곡 ‘이매진’도 그런 노래다. 국가도 민족도 종교도 없는 세상, 서로 편을 가르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배경음악은 오래도록 여운을 준다.
음악보다 정치적으로 악용된 예술 또한 드물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악보다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예술 또한 없다. 진짜 좋은 음악은 그 바탕에 언제나 휴머니즘을 깔고 있다.
음악은 문학과 춤과 연극과 인생이 어우러진 대서사시이다. 그래서 불꽃을 돌며 춤추는 인디언들보다 격렬하고, 사랑을 나눌 때보다 더 뜨겁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통곡보다 더 슬프고, 누군가를 유혹하는 소리보다 더 매혹적이다.
음악이 ‘내 멋대로’ 불릴 때 가장 흥이 나지만, 진정 ‘제멋대로’ 불려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금지곡은 딱 한 곡이다. 한때는 18번이었으나 지금은 나만의 금지곡,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금지 안 된 금지곡이다. 딱히 이유도 없다. 그래도 기꺼이 묻는다면, 차마 ‘내 멋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