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비타민 한 알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9월 23일(월) 00:00
일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뚝뚝 몇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순식간에 굵은 장대비로 변했다. 도로 위의 먼지들까지 금세 도랑을 이루어 흘러갔다. 기습하듯 쏟아진 비에 누구는 손우산을 하고서 후닥닥 뛰고, 누구는 갈까 말까 망설이고, 누구는 보란 듯이 우산을 펼쳐 들었다.

나는 느긋했다. 우산도 있고 몇 미터만 가면 주차해둔 차도 있었다. 2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를 1시간이나 먼저 나왔으니 여유도 있었다. 마침 광주역 앞이라 발길은 저절로 그쪽을 향했다. 한때 얼마나 자주 드나들던 곳인가.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지만 그때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던 때였다. 혼자거나 여럿이거나, 조용하거나 왁자하거나 늘 설렘과 불안, 희망과 절망 같은 심적 상황들에 허덕이던 때이기도 했다. 그 현장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래된 것들이 늘 그렇듯이 역사 안은 잔치 끝난 마당처럼 휑해 보였다. 안이나 밖이나 쇠락을 면치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용객도 거의 없는 듯했다. 모두가 빠르고 편리한 쪽으로 선회한 마당에 과거의 영화란 한 줌 추억거리로나 남아 있을 뿐인가.

더 해찰을 부리기엔 어느새 시간이 촉박했다. 비는 아까보다 더 세차게 쏟아졌다. 섬광처럼 번개가 번뜩이고 우르릉 쾅 천둥까지 요란했다. 몸은 벌써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그게 대수랴. 폭우를 뚫고 용감히 전진할 수밖에. 급히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고속으로 작동시키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근데 이게 뭐지? 덜컹 뭔가에 걸리는 듯싶더니 차가 움직이지를 못했다. 더 세게 페달을 밟아 봐도 헛바퀴만 도는지 고무 타는 냄새가 매캐했다. 뭔가 앞을 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밖으로 나가보았다. 몸을 굽혀 아래를 들여다보니 세상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데다 자동차 바퀴와 묘하게 얽혀 있는 거다. 그제야 무단 주차를 막고자 설치해놓은 것임을 알았으나 돌이킬 수도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듯 앙버티고 있다니….

어떡하지? 누구 없나? 두리번두리번, 아무리 둘러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비바람만 세차게 몰아치고 있을 뿐 후미진 골목길은 심지어 음산하기까지 했다. 사소한 다툼이었지만 아직 말 걸기는 싫은데, 오가는 시간 빼면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별수 없이 남편을 불렀다. 그 역시 근무 중이었지만 내 숨넘어가는 소리에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업 시간은 바짝바짝 가까워지고 나는 발까지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손길이 없으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뿐더러 수업은 물론 다른 일들도 줄줄이 차질을 빚을 게 뻔했다. 일각이 여삼추(一刻 如三秋), 기다리는 사람은 왜 이리 더디 오는 것인지, 제발 어서 나타나 주시라, 간절히 빌었다.

간절하면 우주도 돕는다고 했던가. 저만치 노란 비옷을 입은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게 보였다. 점점 나와 가까워졌다. 나는 결코 놓치면 안 될 것처럼, 그냥 지나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애타게 바라봤다.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그가 다가왔다. 그는 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오토바이를 내린 후 차 밑을 들여다보았다. 깊숙이 몸을 구부려 끙끙 몇 번 힘을 쏟는가 싶더니 걸려 있던 바윗덩이를 시원하게 치워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내려간 듯 환희의 탄성이 절로 터졌다.

하지만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곧장 오토바이에 올라앉더니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고마워요, 소리쳤으나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골목길엔 아직 거둬들이지 못한 내 미소가 그의 노란 비옷을 따라 엷게 흩어졌다.

아슬아슬 강의실에 도착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는 뚝 그쳤지만 후텁지근한 공기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열의를 다해 수업을 마쳤다. 여느 때와는 달리 다정하고 성의 있는 태도였다. 그건 지어낸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리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은혜가 강의실까지 따라왔다고 할까. 선이 선을 낳았다고 할까.

그날 나는 세상 살맛 나게 하는 비타민 한 알을 특별히 얻어먹은 것이었다. 씹을수록 기분 좋고 음미할수록 힘이 솟는 알약 한 알을 그는 선물처럼 주고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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