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뜨는 밤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9월 13일(금) 00:00 가가
노랗게 탱자 익어가는 추석이다. 호떡 같은 보름달이 부풀어 오를 것이다. 과학자들에게 달은 장대한 우주를 상상하도록 하겠지만, 나에게는 자꾸 옛날을 떠오르도록 최면을 건다.
버스가 섰다. 아이들은 누가 내리나 흙먼지 속을 주시했다. 그리고 뛰어가 짐들을 받았다. 멋지게 차려입은 형들과 누나 그리고 삼촌들, 그 버스가 서는 순간부터 누구네 집에 누가 왔고, 어떤 선물이 들려있는지 금방 마을 구석구석 소문이 났다. 어머니 보약도 신형 라디오도 그렇게 추석과 함께 왔다. 돌이 운동화도 순이 설빔도 그랬다.
그러면 자식들이 저 먼 이국땅에서라도 온 듯, 아버지는 닭을 잡고 어머니는 서둘러 떡 접시를 내놓았다. 온 집안은 무슨 잔치라도 하듯 1년 시름을 털어냈고, 마을은 새 세상이라도 된 듯 온통 축제였다. 추석 한가위는 마을 앞 정류장에서 시작했다.
이촌향도의 절정, 민족대이동, 귀향은 치열한 전쟁이었고, 흑백 TV에서는 종일 전쟁을 방불케 하는 귀향 현장을 보여주며 귀성을 독려하고 미화했다. 고속도로는 밀렸고, 급한 나머지 우산으로 가리고 도로변에서 일을 보는 이도 종종 있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그럭저럭 왔다고 해도 또 광주에서 완도고 신안이고 섬까지 가는 길이 여간 아니었다. 물건이 부서지고 차에 놓고 내리고, 난리가 따로 없었다.
광주에서 사는 나도 일부러 그 귀성 버스를 탔다. 그 혼잡이 오히려 부럽고 좋았다. 버스에는 닭을 사 오다가 그만 닭이 유리창 밖으로 날아가 버려서 한숨짓던 능주 아재도 있고, 애써 팔러 간 수박을 누가 깔고 앉은 바람에 깨졌다고 울고불고하던 보성 아짐도 있었다. 장날 풍경과 비슷했다. 하지만 닭이 날아다니거나 강아지가 의자 밑으로 다니는 일은 없었다. 농산물로 사람 반 물건 반인 장날과 달리 추석 귀성 버스는 각종 선물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푹푹 찌는 차안, 사람들은 만원 버스 속에서도 웃음이 넘쳐났다.
그 와중에도 짝사랑한 친구라도 탔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누구야!” 큰소리가 났다. 아마 누군가 아주머니 엉덩이를 잘못 만진 모양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고 시끄러웠다. 그땐 좀 그랬다. 요란했다. 신작로를 달리는 차는 마치 파도를 헤치고 가는 배와 같이 출렁거렸고, 덜컹거릴 때마다 “어이쿠!” 하면서도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졌던, 되레 흥겨웠던 때였다. 그렇게 이리저리 부대끼며 타인의 심장이 나처럼 뛰고 상대의 숨소리가 나처럼 다사롭다는 것을 첨 느꼈다. 그게 사랑이었다.
추석은 이름 그대로 가을밤, 저녁달이 떠야 진짜다.
우린 마을 공터에 모여 놀기 바쁜 개구쟁이였다. 우리가 노는 사이, 동네 선배들은 마을 앞 냇가에서 앞마을 뒷마을 또래들과 걷곤 했는데, 훗날 알고 보니 이들은 어느새 각각 부부가 되어 있었다. 보름달 달빛 때문이었을 게다. 장가 못 갈 거라고 애달파했던 종만이도 못생긴 춘돌이도 남자답게 보였고, 까탈스러운 미숙이나, 깔끔을 부리던 춘심이도 보름달 앞에서는 야들야들해지고 나긋나긋해졌다. 고향은 아니 추석날 보름달은 그냥 허투루 뜨지 않았다. 구석구석 가난한 사람들 마당은 물론, 꽁꽁 닫힌 사람들 빗장도 슬그머니 풀어주었다. 기묘하게도 쓸쓸한 이들을 잘도 연결해주는 중매쟁이였다.
가난한 집에는 누군가 몰래 쌀을 가져다 놓기도 했고, 아픈 이가 있는 집에는 서로 손을 빌려주며 함께 송편을 빚기도 했다. 고샅 여기저기서 막걸리와 음식을 권했고, 잔을 비우면 그릇 속에 고봉 가득 새하얀 웃음이 남던 때였다.
대추도 익고 감이 익어가는 것처럼 집마다 사람들 인심도 발갛게 익어가는 추석이었다.
모기 입도 비틀어진다는 처서가 엊그제 지난 것 같은데, 아니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입추가 어제 같은데, 추석이다. 그때 추석은 보름달이 뿌려놓은 금싸라기를 밟고 왔다가 새벽이슬에 홍시 떨어지듯 갔다. 그사이 사랑도 익고 사람도 익어갔다.
그 보름달 금싸라기 달빛에 모난 이도 뾰쪽한 이도 달을 닮아 늡늡해지고 유순해지는 날이다.
해남과 고흥, 영광에서도 달이 뜰 게다. 난 그 노랗고 동그란 달이 그립다. 그때 그날 밤 달은 훈훈한 사랑과 웃음이 가득 찬 만월이었고, 그런 둥그레진 마음을 닮은 달이었다.
버스가 섰다. 아이들은 누가 내리나 흙먼지 속을 주시했다. 그리고 뛰어가 짐들을 받았다. 멋지게 차려입은 형들과 누나 그리고 삼촌들, 그 버스가 서는 순간부터 누구네 집에 누가 왔고, 어떤 선물이 들려있는지 금방 마을 구석구석 소문이 났다. 어머니 보약도 신형 라디오도 그렇게 추석과 함께 왔다. 돌이 운동화도 순이 설빔도 그랬다.
광주에서 사는 나도 일부러 그 귀성 버스를 탔다. 그 혼잡이 오히려 부럽고 좋았다. 버스에는 닭을 사 오다가 그만 닭이 유리창 밖으로 날아가 버려서 한숨짓던 능주 아재도 있고, 애써 팔러 간 수박을 누가 깔고 앉은 바람에 깨졌다고 울고불고하던 보성 아짐도 있었다. 장날 풍경과 비슷했다. 하지만 닭이 날아다니거나 강아지가 의자 밑으로 다니는 일은 없었다. 농산물로 사람 반 물건 반인 장날과 달리 추석 귀성 버스는 각종 선물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푹푹 찌는 차안, 사람들은 만원 버스 속에서도 웃음이 넘쳐났다.
그 와중에도 짝사랑한 친구라도 탔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누구야!” 큰소리가 났다. 아마 누군가 아주머니 엉덩이를 잘못 만진 모양이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고 시끄러웠다. 그땐 좀 그랬다. 요란했다. 신작로를 달리는 차는 마치 파도를 헤치고 가는 배와 같이 출렁거렸고, 덜컹거릴 때마다 “어이쿠!” 하면서도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졌던, 되레 흥겨웠던 때였다. 그렇게 이리저리 부대끼며 타인의 심장이 나처럼 뛰고 상대의 숨소리가 나처럼 다사롭다는 것을 첨 느꼈다. 그게 사랑이었다.
추석은 이름 그대로 가을밤, 저녁달이 떠야 진짜다.
우린 마을 공터에 모여 놀기 바쁜 개구쟁이였다. 우리가 노는 사이, 동네 선배들은 마을 앞 냇가에서 앞마을 뒷마을 또래들과 걷곤 했는데, 훗날 알고 보니 이들은 어느새 각각 부부가 되어 있었다. 보름달 달빛 때문이었을 게다. 장가 못 갈 거라고 애달파했던 종만이도 못생긴 춘돌이도 남자답게 보였고, 까탈스러운 미숙이나, 깔끔을 부리던 춘심이도 보름달 앞에서는 야들야들해지고 나긋나긋해졌다. 고향은 아니 추석날 보름달은 그냥 허투루 뜨지 않았다. 구석구석 가난한 사람들 마당은 물론, 꽁꽁 닫힌 사람들 빗장도 슬그머니 풀어주었다. 기묘하게도 쓸쓸한 이들을 잘도 연결해주는 중매쟁이였다.
가난한 집에는 누군가 몰래 쌀을 가져다 놓기도 했고, 아픈 이가 있는 집에는 서로 손을 빌려주며 함께 송편을 빚기도 했다. 고샅 여기저기서 막걸리와 음식을 권했고, 잔을 비우면 그릇 속에 고봉 가득 새하얀 웃음이 남던 때였다.
대추도 익고 감이 익어가는 것처럼 집마다 사람들 인심도 발갛게 익어가는 추석이었다.
모기 입도 비틀어진다는 처서가 엊그제 지난 것 같은데, 아니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입추가 어제 같은데, 추석이다. 그때 추석은 보름달이 뿌려놓은 금싸라기를 밟고 왔다가 새벽이슬에 홍시 떨어지듯 갔다. 그사이 사랑도 익고 사람도 익어갔다.
그 보름달 금싸라기 달빛에 모난 이도 뾰쪽한 이도 달을 닮아 늡늡해지고 유순해지는 날이다.
해남과 고흥, 영광에서도 달이 뜰 게다. 난 그 노랗고 동그란 달이 그립다. 그때 그날 밤 달은 훈훈한 사랑과 웃음이 가득 찬 만월이었고, 그런 둥그레진 마음을 닮은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