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길 위의 집-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9월 09일(월) 00:00 가가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존재다. 집은 그런 움직임에서 어떤 기준점으로 작용한다. 떠난다는 것은 집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며 돌아온다는 것은 집으로의 귀환을 뜻한다. 집은 나의 중심인 동시에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 된다. ‘공간의 시학’을 펴낸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다’라고 쓴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집은 단순히 주거 공간만이 아니라 거주하는 자의 몽상을 지켜주고,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주고,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 우리의 삶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가 곧 집이라는 말이겠다.
종종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시간을 거쳐 왔다기보다 어떤 공간 혹은 집을 살아온 듯이 느껴지는 거다. 흙과 나무로 지어진 유년의 집과 마당, 오빠네에 끼어 살던 청소년기의 집, 바다가 가까운 작은 신혼방, 그리고 아이들과 더불어 살던 아파트는 내가 통과해온 내 삶의 주요 거점들이다. 아주 어린 꼬마 아이와 좀 더 큰 나, 사춘기의 나와 성인이 된 나, 신혼의 나와 아이 엄마가 된 나의 모습이 때론 숏폼처럼 때론 슬로우모션처럼 지나갈 때 그 배경에는 언제나 집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꿈 꾸고 방황하고 다시 희망하기를 거듭하였다.
지나온 삶이 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그 집은 더 애틋하게 그립다. 아장거리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도록 살았던 집, 네 식구가 오순도순 함께했던 집, 그만큼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쌓인 곳이다. 거기 사는 동안 다른 곳을 원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어울려 지내던 이웃들이 쏙쏙 빠져나가도 나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지내기에 불편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새집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떠날 까닭이 뭔가. 식구들 돌보랴 일터에 나가랴 늦깎이 공부하랴, 딴 데 마음 둘 수도 없었지만….
붙잡는 건 또 있었다. 창밖의 벚나무는 볼 때마다 새로웠다. 꽃피어 화르르 날리는가 싶으면 초록이 짙어졌고, 무성하다 싶으면 금세 나목이 되었다. 운치 좋은 정자도 있었다. 지붕 위로 노란 은행잎이 내리거나 소복하게 흰 눈이 쌓일 때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늘 다니는 거리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없던 가게가 새로 생기고 있던 가게가 없어지기도 했다. 이발소도 문구점도 분식집도 있다가 없어졌다. 길모퉁이 식당은 어느 날 문득 카페로 변신해 있었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들을 기웃대며 걸을 때면, 동네 어귀에 서 있는 고목처럼 늙어가도 괜찮지 싶었다.
동네 산책로, 그곳은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길이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거대한 미술품처럼, 바깥쪽은 철제 벽을 높이 세워 차들의 소음을 차단하고 안쪽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드높이 하늘을 들여놓았다. 그대로 두었다면 온갖 소음에다 오물이나 내던져진 쓰레기장에 불과했을 텐데, 누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키 큰 메타세쿼이아 아래 맥문동꽃이 피거나 꽃무릇이 일제히 붉디붉게 뒤덮이면 덩달아 작품이 된 느낌이었다.
그 집 그 동네를 떠나오고 난 뒤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있다. 수많은 상실을 경험한 자의 초라한 자구책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효과는 상당하다. 우리는 절대 붙박이가 아니라는 것,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끊임없이 욕망하고 움직이는 길 위의 존재라는 거다. 저 너머를 동경하는 여행자들이다. 그러니 무엇을 많이, 오래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왜? 왜냐면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하니까. 길 떠나는 자는 짐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동화 속의 ‘한스’가 행복했던 이유도 가벼웠기 때문이니까.
집은 누구에게나 삶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단순히 주거 공간만이 아니라 거주하는 자의 몽상을 지켜주고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주고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 과거의 집이거나 현재의 집이거나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의 집이거나 모든 집은 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부단히 떠나야 하는 존재에게 집은 가방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여행자의 몸은 가벼울수록 좋다. 약간의 쓸쓸함과 미열, 아쉬움 정도는 챙겨가도 좋다. 오히려 좋은 채찍이 될 수 있다.
지금 나는 능선이 순하고 부드러운 산 아래 있지만, 언제 또 이곳을 떠나게 될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언젠가는 아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간신히 알고 있을 뿐이다. 하여 너무 상심할 일도, 고집스레 집착할 일도 없다. ‘지금 여기’나 잘 챙겨볼 일이다.
동네 산책로, 그곳은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길이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거대한 미술품처럼, 바깥쪽은 철제 벽을 높이 세워 차들의 소음을 차단하고 안쪽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드높이 하늘을 들여놓았다. 그대로 두었다면 온갖 소음에다 오물이나 내던져진 쓰레기장에 불과했을 텐데, 누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키 큰 메타세쿼이아 아래 맥문동꽃이 피거나 꽃무릇이 일제히 붉디붉게 뒤덮이면 덩달아 작품이 된 느낌이었다.
그 집 그 동네를 떠나오고 난 뒤 새삼스레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있다. 수많은 상실을 경험한 자의 초라한 자구책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효과는 상당하다. 우리는 절대 붙박이가 아니라는 것,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끊임없이 욕망하고 움직이는 길 위의 존재라는 거다. 저 너머를 동경하는 여행자들이다. 그러니 무엇을 많이, 오래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왜? 왜냐면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하니까. 길 떠나는 자는 짐을 최소화해야 하니까. 동화 속의 ‘한스’가 행복했던 이유도 가벼웠기 때문이니까.
집은 누구에게나 삶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단순히 주거 공간만이 아니라 거주하는 자의 몽상을 지켜주고 몽상하는 이를 보호해주고 평화롭게 꿈꾸게 해준다. 과거의 집이거나 현재의 집이거나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의 집이거나 모든 집은 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부단히 떠나야 하는 존재에게 집은 가방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여행자의 몸은 가벼울수록 좋다. 약간의 쓸쓸함과 미열, 아쉬움 정도는 챙겨가도 좋다. 오히려 좋은 채찍이 될 수 있다.
지금 나는 능선이 순하고 부드러운 산 아래 있지만, 언제 또 이곳을 떠나게 될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언젠가는 아주 떠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간신히 알고 있을 뿐이다. 하여 너무 상심할 일도, 고집스레 집착할 일도 없다. ‘지금 여기’나 잘 챙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