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아름다운 손가락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9월 01일(일) 22:30
뿌지직 소리와 함께 밟던 가지가 뚝 떨어졌다. 얼마 뒤, 눈을 떴을 때야 나무에서 떨어졌음을 알았다. 다행히 몸은 괜찮은데 오른손이 좀 이상했다. 아니 손가락, 식지였다. 제법 큰 나뭇가지가 손을 덮친 것이다.

겨울이면 나무를 했다. 나무 밑동, 가시덩굴, 푸나무, 삭정이 가리지 않았다. 그날은 삭정이를 꺾으려고 소나무에 올랐다가 그만 가지가 부러져 떨어진 것이다. 다친 손가락은 좀체 낫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날도 나무를 한 짐 해서 지게에 지고 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지게는 내겐 커서 땅에 곧잘 닿았다. 그래서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조심했다. 그런데 잠깐 틈에 그 지겟다리가 돌멩이에 걸렸다. 순간 난 중심을 잃고 쓰러져 하필 그 손이 작대기에 끼어 또 검지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오른손 손가락 시련은 기묘하게 멈추지 않았다. 나락을 가득 리어커에 싣고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고랑창으로 빠졌을 때도 그 손가락이었고, 경운기 사고 때도 하필 그 두지가 부러졌다.

그래서일까. 그 손가락만은 조금 야위고 비틀어졌다. 병원은 못 가고 응급처치로 대충 끝낸 손가락, 훈장처럼 상처를 달고 다니는 부끄러움 많이 타는 손가락, 못난 내 운명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손가락이다.

이후로, 난 누구를 만나면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남들에게 첫인상이 얼굴이겠지만 내겐 손이었다. 악수할 때면, 상대가 내 손가락 크기를 느낄까 봐 재바르게 손을 빼곤 했다. 많은 이가 그런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어떤 이는 좀 휘었느니, 구부러졌느니, 늙었느니, 못생겼느니 했고, 또 어떤 이는 젊어서 자주 싸웠거나 사춘기 때 화가 나서 벽이라도 쳤느냐며 그런 사람 아닐 것 같은데 고민 많았던 모양이라며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나마 고생 많았겠다고 위로를 보내 주는 이들로부터 좀 위안이 되었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손가락이다.

도시로 와 생활하면서 그 손가락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인해 가장 난처할 때는 훈련병 시절이었다. 사격 훈련 때마다 나는 가장 굼떴다. 당겨야 하는 방아쇠에 손가락이 자주 결렸다. 조교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입대했냐고 밥값 하라고, 째려보았다. 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더욱 열심히 사격에 임했다.

신체검사 때 손가락 이야기를 하였다면 입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군인이 되고 싶었고, 그 손가락을 부끄럽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못난 집게에 대해 일체 함구했다.

그런 그 검지 때문에 황야에서 무법자와 맞대결을 펼친다면 여지없이 난 그 손가락 때문에 제일 먼저 쓰러졌을 사람이다. 다행히 무탈하게 군 병역을 마치고 취직하여 곧장 결혼하였다. 그 손가락은 내 삶을 더는 방해하지 않았다.

훗날 살다가 우연히 아내에게 물었다. 내 어디가 좋아서 나와 결혼했느냐고. 아내는 싱긋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떼를 쓰자, 손가락, 아내는 내 손가락이 제일 예쁘다고 했다. 그 식지를 보고 확신했단다. 내 굴곡진 삶이 미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고 여겼는지, 이름처럼 굶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연민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날 후, 난 그 손가락이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구박받고 소외된 손가락을 깔끔하고 의로운 존재로 바꿔주었다. 그 손가락이 나를 지켰고 키웠다는 게다. 희생할 줄 아는 그 상처 덕분에 다른 손가락도 그리고 다른 부위도 건사할 수 있었던 셈이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 승리의 V를 나타날 때, 무엇을 가리킬 때는 물론 콧구멍을 팔 때나 가려운 몸을 시원하게 할 때, 제일 먼저 나선 손가락, 서열은 둘째지만 가장 부지런하고 용기 있는 그 손가락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이 손가락이야말로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나선 어머니며, 국가를 지킨 떳떳한 군인이자 나를 키운 정체성 아니겠는가.

그 손가락 두지는 내 삶의 이력서이자 지문이다. 내 삶의 노고가 오롯이 새겨진, 자기를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못생긴 손가락이 나는 뺀질뺀질 한 손가락, 잘난 손가락보다 백배 천배는 더 예쁘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