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여름 한낮을 영화와 함께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8월 25일(일) 22:30
일상을 영화처럼 살 수 있을까? 아니 일상이 영화 같을 수는 없을까?

그런 영화들이 더러 있지만 그중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은 대놓고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 잘만 하면 내 일상도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잘만 하면’이라는 난해한 조건이 붙긴 하지만 아마 감독이 노린 것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의 일상도 영화처럼 아름다워요’라거나, ‘당신의 삶도 영화가 될 수 있어요’라는 위안. 혹은 평범한 일상이라도 좀 다른 시각을 가져보면 어때요? 하는 제안이나 질문일 수도 있겠다. 물론 영화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미장센과 대사를 통해 또 다른 심층적 맥락을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선은 그 일상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렇게 지루한 날에는 누군가의 삶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니까.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인 ‘패터슨’의 일주일간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담은 영화다. 주인공의 일주일을 보여주고 있지만 특별한 일주일이 아니라 언제나처럼 비슷한 날들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주일이며, 날마다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매번 그 차이를 드러내는 변주된 반복이다. 중요한 것은 버스 운전사이자 시인이라는 ‘패터슨’의 정체성이다.

그는 버스 운전사라는 직업에 충실한 종사자이며 일하는 틈틈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알려진 시인도 아니고 시집을 출간한 적도 없으며 그러기를 욕망하는 것 같지도 않은 아마추어로 보이지만, 시는 이미 그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있다. 매일매일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소모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공간, 사람들, 풍경에 대한 사뭇 진지한 의식과 태도를 지님으로써 그의 시간은 좀 더 유의미하게 확장된다. 버스 운전사와 시인이라는 다소 엉뚱한 조합은 서로 방해가 된다기보다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되는 성싶다.

사실 영화의 주제는 이미 ‘패터슨’이라는 세 글자에 다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패터슨’은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가 사는 도시의 이름이기도 한데,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이 이름은 영화의 내용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패터슨’이라는 이름의 발음은 같지만 각기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듯이, 영화 역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매일 잠에서 깰 때의 자세와 기상 시간이 약간씩 다르고, 아내와 주고받는 말들이 다르고, 차에 타는 승객들의 모습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다르다. 날마다 들르는 단골 바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심지어 애완견 마빈의 일상조차도 날마다 같은 것이 아니다. 요컨대 ‘패터슨’은 일상이라는 형식의 반복과 그 내용의 차이를 통해서 일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뭇 진지하고 친절한 질문을 내놓는다. 날마다 똑같은 반복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아닌가.

‘패터슨’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건은 ‘패터슨’의 시노트를 반려견 ‘마빈’이 갈기갈기 찢어버린 일이다. 즉, 그동안의 작업이 한순간에 무위로 돌아가고 마는 뜻밖의 사태가 ‘마빈’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빈’의 존재가 왜 그토록 자주 화면에 등장했던 것인지 비로소 그 의도가 드러난 셈이다. ‘마빈’은 단순한 잉여적 출연자가 아니라 ‘시’를 쓰는 패터슨의 일상에 전복을 가함으로써 그의 시 쓰기가 다시 새로워지기를 요구하는 주동적 역할의 수행자였던 것. 늘 익숙한 보통의 존재이면서 전혀 그렇지 않은 존재가 곧 ‘마빈’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는 차이를 생성해내는 가능성 찾기의 소임을 산뜻하게 일깨워주는 존재 ‘마빈’.

유년의 내 일기장에는 매일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곤 했다. 억지로 써야 하는 탓도 컸지만 정말로 쓸 것이 없기도 했다. 날마다 같은 풍경, 같은 친구들, 같은 일과였으므로 달리 쓰려야 쓸 것도 없었다. 일기는 대략 서너 줄이면 족했다. 오늘은 누구와 무엇을 하고 놀았으며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었는지, 혹은 친구와 싸웠지만 앞으로는 더 사이좋게 지내야겠다는 반성과 다짐 정도, 그 이상은 쓸 게 없었다. 그러다 ‘마빈’ 같은 인물이 등장하거나 그런 일이 일어난 순간이면, 일기장은 모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만큼이나 풍성하게 부풀었다.

‘패터슨’과 ‘마빈’과 더불어 후텁지근 덥고 지루한 여름 한낮을 새롭게 타격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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