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방·오픈런·번아웃…우리 앞에 도래한 ‘진짜’ 현실
2024년 08월 22일(목) 21:50 가가
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등 21명 지음
장강명 등 21명 지음
“오래 머물면 새벽에 갇힌다. 조심해.”
천선란의 소설 ‘새벽 속’에 등장하는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작품 속 인물은 새벽배송에 나선 청춘들. 작품에는 “새벽운동처럼 일하고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학업과 본업에 매진하는” 사람들과 작업 도중 갑작스레 쓰러진 이들의 허무한 죽음, 이를 방관하고 은폐하는 자들의 모습까지 담겼다.
재벌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로 스타 강사가 된 주인공이 등장하는 김동식의 ‘그 분의 목숨을 구하다’도 인상적이다. “만약 여러분이 ‘그분’의 생명의 은인이 됐습니다. 저는 바보처럼 그냥 돈을 요구했는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돈, 번아웃, 사교육, 자연인, 거지방, 고물가, 중독, 노동, 가족….
‘소설, 한국을 말하다’는 21인의 작가가 소설로 써내려간 ‘대한민국 해부도’다. 수록작들은 한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로 주제와 소재, 이야기의 키워드는 필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했다. 전제는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함께 지나는 ‘지금, 여기’의 ‘우리’를 드러낼 것. 기획자는 “애초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게 소설이 하는 일 중 하나고, 소설가들은 늘 인간의 마음을 유영하고 있기에” 작가들과의 협업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4000자 내외의 초단편 소설이지만 담긴 이야기는 깊고 넓다. 모두 만만찮은 내공을 갖고 있는 작가들인 터라 아주 짧은 글 안에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반전이 담겨 있고 눈물과 웃음, 탄식이 공존한다.
첫 글인 장강명의 ‘소설 2034’부터 눈길을 끈다. ‘소설, 한국을 말하다’의 2034년 버전을 준비하는 신문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작품집의 ‘프롤로그’로 제격이다. 외국인 계절노동자들의 처지를 보여준 백가흠의 ‘빈의 두번째 설날’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돈 벌러 온 한국에서 힘든 나날을 보낸 베트남 노동자의 눈물이 어른거리는 작품으로, 자신의 안위 대신 따뜻함을 보여준 고용주의 오토바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뭉클하다.
과학 저술가 곽재식은 전공 분야를 살려 AI를 소재로 한 ‘제42회 문장 생성사 자격면허 시험’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가져올 이야기들에 대해 말하며 부부간의 ‘섹스리스’에 대해 다룬 정진영의 ‘가족끼리 왜 이래’도 눈길을 끈다.
날카로운 글 만 있는 건 아니다. ‘팬심’을 키워드로 삼은 이경란의 ‘덕질 삼대’는 유쾌하다. 트로트 경연에 등장한 가수 ‘호걸’을 좋아하는 할머니, ‘송골매’의 오래된 팬인 엄마, 아이돌 그룹 NBT 팬클럽 회원인 손녀까지 ‘좋아하는 사람’에 진심인 삼대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반려동물’을 다룬 정이현의 ‘남겨진 것’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와 반려견 ‘우동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현대적 삶과 예술’을 주제로 한 김영민의 ‘변기가 질주하오’에는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적인 작품인 ‘변기’를 들고 도망치는 남자와 추격자들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그밖에 ‘오픈런’을 다룬 손원평의 ‘그 아이’, ‘중독’을 키워드로 삼은 강화길의 ‘화원의 주인’, ‘콘텐츠 과잉’이 소재인 구병모의 ‘상자를 열지 마세요’ 등을 만날 수 있다. <은행나무·1만68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천선란의 소설 ‘새벽 속’에 등장하는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작품 속 인물은 새벽배송에 나선 청춘들. 작품에는 “새벽운동처럼 일하고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학업과 본업에 매진하는” 사람들과 작업 도중 갑작스레 쓰러진 이들의 허무한 죽음, 이를 방관하고 은폐하는 자들의 모습까지 담겼다.
돈, 번아웃, 사교육, 자연인, 거지방, 고물가, 중독, 노동, 가족….
첫 글인 장강명의 ‘소설 2034’부터 눈길을 끈다. ‘소설, 한국을 말하다’의 2034년 버전을 준비하는 신문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작품집의 ‘프롤로그’로 제격이다. 외국인 계절노동자들의 처지를 보여준 백가흠의 ‘빈의 두번째 설날’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돈 벌러 온 한국에서 힘든 나날을 보낸 베트남 노동자의 눈물이 어른거리는 작품으로, 자신의 안위 대신 따뜻함을 보여준 고용주의 오토바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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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의 작가가 참여한 ‘소설, 한국을 말하다’는 번아웃, 노동, 새벽배송, 사교육 등 다양한 키워드로 대한민국의 현재를 묘사한 작품을 담고 있다. 사진은 사교육 현장인 학원가 모습. <광주일보 자료사진> |
날카로운 글 만 있는 건 아니다. ‘팬심’을 키워드로 삼은 이경란의 ‘덕질 삼대’는 유쾌하다. 트로트 경연에 등장한 가수 ‘호걸’을 좋아하는 할머니, ‘송골매’의 오래된 팬인 엄마, 아이돌 그룹 NBT 팬클럽 회원인 손녀까지 ‘좋아하는 사람’에 진심인 삼대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반려동물’을 다룬 정이현의 ‘남겨진 것’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와 반려견 ‘우동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현대적 삶과 예술’을 주제로 한 김영민의 ‘변기가 질주하오’에는 위대한 예술가의 세계적인 작품인 ‘변기’를 들고 도망치는 남자와 추격자들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그밖에 ‘오픈런’을 다룬 손원평의 ‘그 아이’, ‘중독’을 키워드로 삼은 강화길의 ‘화원의 주인’, ‘콘텐츠 과잉’이 소재인 구병모의 ‘상자를 열지 마세요’ 등을 만날 수 있다. <은행나무·1만68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