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곰스크’로 가는 기차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8월 11일(일) 22:30
어렸을 때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는 언제나 아련한 동경심을 불러왔다. 기적소리가 먼저였는지 기차가 먼저였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내 호기심을 키우는 데 그만한 자극제는 없었지 싶다. 산촌의 소풍 장소는 늘 정해져 있기 마련이어서, 봄이면 벚꽃이 화사한 하구의 강둑으로, 가을이면 들국화가 함초롬한 산마루터로 줄지어 떠나곤 했다. 아름드리 둥치 아래 모여서 도시락을 먹을 때, 그 위로 꽃잎이 나풀거렸다. 흥겨운 듯 신바람이 난 듯 공중을 맴돌던 그 연분홍 꽃잎들. 그러나 산마루에서 바라보던 드넓은 벌판과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기차의 거친 숨소리에 비하면, 내 심장은 아무래도 높은 산마루에서 더 쿵쾅거렸던 것 같다.

그 시절 기차는 산마루에 올라서서나 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문명이었다. 산 아래 작고 나지막한 동네가 세계의 전부였던 때, 그렇게나 길고 도도하고 신기한 물체는 이제까지는 없는 것이었다. 저 바닷속 어디에 살던 이무기 한 마리가 용이 되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첨단의 진화생물체가 되어 이 도시 저 도시를 활주하는 것도 같은 장중하면서도 날렵한 물체. 눈을 휘둥그레하게 하는 그 거대한 물체가 산과 산 사이 작은 길을 뚫고 뚜우, 빠앙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릴 때, 산모퉁이를 돌아 아득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볼 때 나는 이미 거기 몸을 싣고 있었다. 호기심과 설렘을 한가득 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려보는 것이었다.

기적소리가 유난히 크게 다가온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기차가 내뿜는 길고 투박한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저 아래 고여있던 것들이 스르륵 일어나 어서 탈 준비를 하라고 꼬드기는 것도 같고, 꿈과 기대와 동경을 넘치도록 담아서 금방이라도 이뤄질 수 있다고 한껏 북돋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처럼 아득하고 슬펐다. 기쁨도 슬픔도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요동쳤다.

그 기차를 타고 도시에 나와 산 지 퍽 오래되었다. 내가 사는 이 도시가 그토록 동경하던 그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두리번거리는 중이기도 하고 끝내 이르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좋은 집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고 있으나 이게 다가 아닌 듯 싶기도 하다. 정작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을 미뤄둔(혹은 놓쳐버린) 채 뭉그적거리고 있는 건 아닌가 문득문득 조바심을 치기도 한다.

‘프리츠 오르트만’이라는 독일 작가, 그 역시 기적소리를 들으며 자란 것이 아닐까. 그의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는 ‘곰스크’로 가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데, 그런 이야기를 쓰게 된 배경에는 틀림없이 기차 혹은 기적소리가 작용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완서도 자신이 경험한 것밖에는 못 쓴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곰스크’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듣게 된 멀고도 아름다운 도시의 이름이다. 아버지에게서 들었으나 사실은 아버지도 가보지 못한 곳이며, 삶의 모든 기대를 담고 있는 곳이지만 ‘내용을 하나도 알 수 있는 책’처럼 미지의 공간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가야만 진짜 삶이 시작될 것 같은, 남자에게도 어느덧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 곳이다.

결혼 후 남자는 가진 돈을 다 털어 ‘곰스크행’ 기차표를 마련하고 아내와 함께 대망의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도중에 정차한 한 시골역에서 그만 기차를 놓치고 만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하룻밤을 머물게 되지만 여차저차 결국은 그곳에 눌러앉게 된다. 그 사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생활은 더 안정되어 가는데, 그렇게 ‘살 만하게’ 바뀔수록 ‘곰스크’는 더 멀어진다. 하지만 멀리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의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울려올 때면 아직도 고통스러운 무엇이 솟구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이 짧은 소설이 품고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누구의 인생이라도 그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곰스크’를 꿈꾸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그만 잊어버리고 있거나, 도시의 온갖 소음에 휩싸여 기적소리 같은 건 듣지도 못하거나. 그러나 종종 묻힌 것이 되살아온다. 되풀이되는 통증처럼 ‘곰스크’를 앓는다. 마음 깊숙한 어느 곳, 또 다른 무엇을 향하여 다시금 그 기차를 기다려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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