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석 달 열흘 붉은 꽃-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7월 28일(일) 22:30 가가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은 기우나니라…’ 어려서 자주 듣던 노랫말이다. 강변에 자리 잡은 탓인지 우리 동네 어른들은 유독 풍류를 즐겼고 그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노래였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자주 듣게 되다 보니 어린 귀에도 저절로 익숙해졌다. 어서 와 함께 놀기를 청하는 노랫말의 비유가 얼마나 기막힌 것인지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열흘 붉기 어렵고, 제 아무리 둥근 달이라도 금세 이지러지기 마련이듯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은 것이라. 불콰해진 얼굴에 감돌던 그 취흥의 순간이 어스름한 달빛처럼 묘한 슬픔을 안겨주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꽃들은 그 모양이나 빛깔도 제각각 다르다. 같은 이름의 꽃이라도 때에 따라 다르고 장소에 따라 다르다. 아침 꽃 다르고 저녁 꽃 다르다. 들판에 필 때, 물가에 필 때, 산중에 필 때 다르다.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보는 주체에 따라서도 다르다. 꽃에 정해진 본질은 없다. 꽃이 불러일으키는 정서 역시 규정할 수 없다. 꽃은 다양하고 개별적이며 독자적이고 개성적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모든 꽃의 공통된 속성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꽃이라고 하지만 며칠을 못 가서 저버리고 만다. 개화의 기쁨은 잠시뿐이고 낙화의 비감은 더 오래 남는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유난히 지는 꽃에 민감하다. 동백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고, 벚꽃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하고, 목련은 애당초 흙에서 나온 것임을 증명하듯 ‘흙빛으로 무너져 내린다’고 탄식한다. 물론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라 열매를 위안 삼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이별로 인한 것이 아닌가.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하고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는 꽃의 허무는 곧잘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나,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나 모두 한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몸소 체득한 결과다. 지금은 가고 없는 저 우리 동네 어른들도 꽃은 금방 지고 삶은 길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우친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흥을 냈겠는가. 진달래가 피었다고, 누구 네가 시집 장가를 갔다고, 누구 네는 환갑을 맞았다고 그때마다 ‘놀기’를 빼놓지 않은 것은, 그 순간이라도 붙잡고 싶은 애틋한 아쉬움에서였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꽃에 눈길 주는 날이 늘어간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래의 탐미심도 있겠지만, 그보다 잠깐이면 떠나버릴 것을 아는 까닭이다. 게다가 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꽃의 향기와 빛깔은 인간을 잡아끌기 충분하다. 꽃은 그 향기와 자태를 뽐내면서 끈질기게 인간을 유혹해 왔다. 유혹만 하지 기다려 주는 일은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 꽃구경을 나서고,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불멸의 순간을 만들고자 애쓴다. 모습은 사라지고 없을지라도 사진에 박힌 순간만은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맘때면 나도 빠지지 않고 꽃구경을 나선다. 만화방창한 봄도 아니고 햇볕 쨍쨍한 한여름에 무슨 꽃구경인가 싶겠지만,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장마가 끝난 여름날의 햇살은 그야말로 땡볕인데, 그 땡볕 아래 펼쳐진 화창한 꽃동산이 여기가 무릉인 듯 선경을 이룬다.
꽃구경은 땡볕에서도 좋고 구름 풍성한 날도 좋지만,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더욱 좋다. 그곳 누마루에 앉아 차라도 한 잔 홀짝이고 있거나 혹은 별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 동반한 소나기라도 내려보라. 후끈한 열기는 가시고 금세 청량해진 공기가 온몸을 간질일 것이다. 비바람 불고 꽃잎 휘날려 그 꽃잎 풀밭 위에 뒹굴 때면, 한 잎 꽃잎처럼 가벼워진 것도 알게 되리라. 그런 날은 낙화의 서러움 같은 건 잊어도 좋다.
연못을 가운데 두고 가장자리를 빙 둘러심은 나무들은 지팡이를 짚고 선 것도 있고, 구멍이 뻥 뚫려 땜질해놓은 것도 있다. 굵고 매끈한 몸피에 멋대로 뻗은 가지는 보는 눈을 압도한다. 못에 비친 하늘과 그 하늘에 다시 핀 꽃가지와 떨어진 꽃잎들의 잔해가 물결처럼 어여쁘다.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하지만, 배롱나무 진분홍 꽃은 석 달 열흘을 붉어 있다. 아래 꽃은 떨어지고 위 꽃은 피어나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꽃이다. 피고 지고, 지고 또 피어서 화무십일홍의 허무를 잊게 하는, 끈질기게 생의 비의(秘義)를 보여주는 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꽃에 눈길 주는 날이 늘어간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본래의 탐미심도 있겠지만, 그보다 잠깐이면 떠나버릴 것을 아는 까닭이다. 게다가 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꽃의 향기와 빛깔은 인간을 잡아끌기 충분하다. 꽃은 그 향기와 자태를 뽐내면서 끈질기게 인간을 유혹해 왔다. 유혹만 하지 기다려 주는 일은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서둘러 꽃구경을 나서고,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불멸의 순간을 만들고자 애쓴다. 모습은 사라지고 없을지라도 사진에 박힌 순간만은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맘때면 나도 빠지지 않고 꽃구경을 나선다. 만화방창한 봄도 아니고 햇볕 쨍쨍한 한여름에 무슨 꽃구경인가 싶겠지만,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장마가 끝난 여름날의 햇살은 그야말로 땡볕인데, 그 땡볕 아래 펼쳐진 화창한 꽃동산이 여기가 무릉인 듯 선경을 이룬다.
꽃구경은 땡볕에서도 좋고 구름 풍성한 날도 좋지만,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더욱 좋다. 그곳 누마루에 앉아 차라도 한 잔 홀짝이고 있거나 혹은 별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 갑자기 천둥번개 동반한 소나기라도 내려보라. 후끈한 열기는 가시고 금세 청량해진 공기가 온몸을 간질일 것이다. 비바람 불고 꽃잎 휘날려 그 꽃잎 풀밭 위에 뒹굴 때면, 한 잎 꽃잎처럼 가벼워진 것도 알게 되리라. 그런 날은 낙화의 서러움 같은 건 잊어도 좋다.
연못을 가운데 두고 가장자리를 빙 둘러심은 나무들은 지팡이를 짚고 선 것도 있고, 구멍이 뻥 뚫려 땜질해놓은 것도 있다. 굵고 매끈한 몸피에 멋대로 뻗은 가지는 보는 눈을 압도한다. 못에 비친 하늘과 그 하늘에 다시 핀 꽃가지와 떨어진 꽃잎들의 잔해가 물결처럼 어여쁘다.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하지만, 배롱나무 진분홍 꽃은 석 달 열흘을 붉어 있다. 아래 꽃은 떨어지고 위 꽃은 피어나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꽃이다. 피고 지고, 지고 또 피어서 화무십일홍의 허무를 잊게 하는, 끈질기게 생의 비의(秘義)를 보여주는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