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땅 한 평
2024년 07월 21일(일) 21:30
아파트 입구에 ‘장등동, 쓰레기 소각장 건설 반대’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나는 반대하지 않는데, 주민 일동이라니, 어이없다.

그들 땅에 소각장을 짓는다니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많은 혜택도 준다는 데 거부한 그들이 부럽고 얄밉다.

시골 친구는 전답을 많이 물려받았다. 또 몇 해 전, 한 친구는 변두리에 작은 땅 하나 물려받았다. 기껏 백 평도 안 되게 작았다. 그런데 최근 그 땅이 금싸라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골 땅은 여태 5000원도 안 되고 구매할 사람도 없다고 울상인데, 한 친구는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희희낙락거린다.

태초에 빛과 어둠이 생기고 땅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이의 땅이었으련만 탐욕스러운 이들은 말뚝을 박고 줄을 쳐서 자기 것, 사유화했다. 그리고 그 땅을 지키거나 차지하기 위해 총을 만들고 대포를 만들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전쟁의 시작이자 역사의 시작이다. 가진 이를 지주, 못 가진 사람은 작인인 시절도 있었다. ‘고지전’은 이념보다도 휴전을 앞두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영화다. 우리가 지상에 건설하려는 이상은 사랑이나 자유라는 이념이 아닌 땅이라는 욕망이란 걸 여실히 보여준다.

우린 한정된 공간에서 살지만, 또 한정된 시간을 산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군대 가고 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지금껏 지켜보았다. 아니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부터 3김이 죽는 과정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고, 할아버지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시간도 그리 오래지 않다는 것도 보았다.

삶에서 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땅이 타인과의 싸움이라면 시간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제아무리 많은 땅을 가졌을지라도 그 딱딱한 땅으로 하루는커녕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다. 그러면서 땅 한 평을 마련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물 쓰듯 마구 쓰고 산다.

사람들은 늘 이 넓은 세상에 내 땅, 한 평 없다고 투덜댄다. 하지만, 내가 존재하는 곳은 두 발바닥이 딛고 선 땅이고 간혹 앉으면 엉덩이 하나 붙일 땅이었다. 그리고 누우면 고작 1미터 남짓이지만, 언제나 땅은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었고, 단 한 순간도 나를 버리고 기만한 적이 없었다.

땅이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울 때는 땅이 흙다울 때이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있고, 새들이 날고,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단풍이 들 때, 땅은 가장 아름답다. 땅은 그렇게 도막도막 나눠지는 두부가 아니다. 그렇게 줄을 긋고 철책을 세울 일이 아니다. 노루가 지나가기도 하고 원추리가 몇 해 차지하기도 했다가 굴참나무가 또 몇 년 서 있고, 지렁이가 살고, 새들이 사랑하고 알을 낳는 곳이기도 했을 때, 땅이다. 그리고 그 농부가 애지중지하는 흙이 생명들에게 소중한 먹거리를 내어줄 때, 땅은 땅으로서 살아있다.

치열하게 살라고 해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 삶은 소유의 과정이었고 돈이든 권력이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 같다.

이제 한풀 꺾어진 나이다. 방향을 바꿔 조용히 나와 싸울 시간, 나와 대결할 준비를 한다. 그 욕망의 끝, 내가 싸울 대상은 땅, 소유가 아닌 무소유 아닐까. 종착역에 이르면 모두 공수래공수거라고 한다. 그토록 소유하고자 무진 애를 쓰던 이가 내린 참혹한 결론, 무소유. 난(蘭) 한 분 소유하지 않는 말랑말랑해진 흙, 무소유다.

퇴직을 앞두고 나는, 교무실에 내 책상이 놓인 한 평 남짓 공간, 그것을 내 것인 양 착각하고 아등바등 살아왔다. 곧 청운의 꿈을 안은 젊은이가 앉을 것이다. 내 자리라고 여태 착각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내 땅 한 평을 비운다.

쓰레기를 소각할 땅이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 되는 땅은 없다. 쓰레기처럼 소각되는 육신, 영원한 삶도 영원한 소유도 없다. 남은 시간은 나와의 싸움, 시간과 싸움에 진중해지고 싶다. 땅 한 평의 넓이보다 영혼의 넓이를 가늠할 줄 아는 내일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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