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도마뱀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7월 14일(일) 22:30
멀리서만 바라보던 산을 이즈음 자주 간다.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조망하는 것도 좋지만 걷는 즐거움도 그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걷기에는 발로, 다리로, 몸으로 만나는 그윽한 쾌감이 있다. 뜻하지 않은 만남과 예기치 못한 기쁨, 행복감, 여러 생각과의 동행은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려준다.

산비탈 바윗돌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볍게 몸을 흔드는 나뭇잎과 그 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맑게 빛났다. 문득 나무그루터기 위로 도마뱀이 보였다. 촉촉하고 날렵해 보이는 자태였다. 의외로 호기심이 생긴 나는 좀 더 가까이 도마뱀한테로 다가갔다. 어라? 도망도 안 가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암갈색의 등과 활짝 펼친 네 개의 발 그리고 살짝 구부린 긴 꼬리가 징그럽기보다 앙증맞아 보였다. 두 눈은 졸고 있는 것 같았다. 동족도 아니고, 익숙한 사이도 아니건만 묘하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도 마주했던 것처럼….

산꼭대기로 소풍을 갔었다. 그곳은 비행기(조그만 헬기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도 떴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넓은 벌판이 있어 전교생이 모여 놀기 안성맞춤이었다. 사방팔방 조망하기로도 그만한 장소가 없었다. 드넓어만 보이던 강이, 마을들이, 학교가, 운동장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골짜기 사이로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우리집 마루에서 듣던 그 소리의 정체가 비로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비밀의 장막을 걷어낸 듯 세상은 환하고 넓고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 도마뱀, 도마뱀이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크고 분명한 소리였으나 어디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급하게 더 크게 외치는 소리.

“야! 니 어깨에 도마뱀이 올라갔다니까.”

그 눈빛이, 손가락이 모두 나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물큰한 느낌, 축축하고 스멀스멀 징그러운…. 나는 옴짝달싹 못 한 채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얼어붙어 버렸다. 그때 무엇인가 내 어깨를 쓱 건드렸고 그와 동시에 함성이 터졌다. 함성 사이에서 누군가 말했다.

“와~ 거멍이가 생명의 은인이다. 도마뱀이 어깨를 넘어가믄 죽는다고 했는디 거멍이가 구해줬으니까 생명의 은인이잖아!”

생명의 은인 덕에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나는 아직 얼떨떨했다. 게다가 나를 구해준 사람이 하필 ‘거멍이’라니. 그로 말하자면 벌레보다 징그럽고 호랑이보다 무서운 놈(!)이었다. 얼굴이 거멓다고 ‘거멍이’라 불렸던 그는 누구 골탕 먹이는 일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고무줄 놀이 하는 우리를 불시에 습격하여 줄을 끊어가 버리는 것도 그였고 ‘아이스께끼’를 외치며 치마를 걷어올리는 것도 그가 제일 앞장이었다. 내가 당한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며칠 전에도 복도를 지나다 갑자기 가슴팍을 툭 치고 도망갔다. 그 바람에 비틀 넘어질 뻔하지 않았던가.

저만치서 ‘거멍이’가 헤헤거리고 있었다. 막대기를 까불거리며 봐라, 이걸로 내가 너를 구했다니까! 의기양양 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따라 영 밉상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얼른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때마침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장기자랑을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모두가 후닥닥 무대 쪽으로 몰려갔다. 소풍은 절정을 향했다.

그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득히 멀어진 일인 줄 알았는데, 엊그제 일처럼 오싹 어깨를 움츠린다. 누군가의 말대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일이었지 않은가. 그날 만약 도마뱀이 내 어깨를 넘어버렸다면 어찌 됐을까? 정말로 죽었을까? 도마뱀은 어떻게 내 어깨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누가 장난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범인은? 더 의문스러운 건 ‘도마뱀이 어깨를 넘어가면 죽는다’라는 말이다. 그 말은 누가 했더라? 어디서 나온 말이지? 그리고 그건 참일까, 거짓일까? 생각할수록 그 진위를 알 수도 없고 확인하기도 어려운 의문투성이의 말들이다. 숫제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헤아려봐도 알 수 없는 삶처럼….

어쨌거나 ‘거멍이’가 생명의 은인인 것은 확실하지 싶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순간의 공포를 어찌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뜩해진다. 그날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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