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개구리 소리 들으며-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7월 07일(일) 22:00 가가
와글와글 꼭 개구리 우는 소리 같다.
시장 골목은 입구에서부터 요란하다. 꼭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그곳에서 말들이 끊임없이 솟아 나온다. 한시도 갇혀 살 수 없다는 듯 내면에 갇혀있던 언어들이 홍수처럼 골목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 많은 욕망을 저 작은 몸이 어찌 가두고 살았을까. 듣는 이는 없고, 온통 말하는 사람만 있는 것 같은, 마구 흩어져 범벅인 자음과 모음에서 용케도 자신들의 언어를 찾아 듣는 이들도 신기하다. 마치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듣는 것 같다.
모내기를 할 무렵 무논은 개구리 천지였다. 써레질하시던 아버지 뒤를 따라 깔망태를 던지고 누가 많이 잡는가? 개구리 잡기 시합하고는 했다. 우린 그 개구리들을 잡아 메뚜기를 꿰듯 꿰미에 가득 꿰어 집으로 왔다.
도시에서 듣는 개구리 소리는 낯설다. 아파트 인공호수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는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귀가 먹먹할 정도로 그악스럽다. 그렇게 외쳐대는 우렁한 소리가 작은 발소리에도 일시에 뚝 멈추는 것을 보면 도시 사람을 닮아 여간 영악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때가 많았다. 꼭 친구들 떠드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머니가 들려주는 자장가 같기도 해서 곧잘 잠이 들었다. 간혹 그 속에 맹꽁이 소리라도 들리면, 멸치를 다듬다가 꼴뚜기 새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비 오는 날 개구리 소리는 유별나게 청승맞게 들린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뒷산에다 묻어 주♬, 눈이 오면 쓸어주고♩ 비가 오면 덮어 주?”
유년의 동요와 더불어 어머니의 말이면 거꾸로 실천했던 청개구리. 냇가에 묻어달라는 어미의 유언을 처음으로 실천해서 무덤까지 잃고 마는 청개구리 동화가 꼭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더욱 슬프다.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 곧잘 시골 어머니가 떠오른다. 변덕스러운 자식을 죽을 때까지 헤아리는 부모와 달리,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자식의 어리석음을 반어적으로 풍자한 우화. 그 청개구리가 바로 너 아니냐고 개굴개굴, 내게 묻는 것 같다.
소나기처럼 개구리 소리가 시원하게 적셔주는 여름밤이다. 개구리 없는 논은 논이 아니고, 개구리울음 없는 여름밤 역시 여름밤이 아니다. 가을에 구성지게 우는 매미 소리처럼 여름철 무논에서 우는 개구리의 합창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슥한 밤에만 산기슭을 내려오는 빨치산 발소리 같기도 하고, 야심한 밤까지 일하고 돌아온 어머니 한숨 소리 같기도 한, 한동네 처녀와 총각이 몰래 만나 속닥속닥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 밥 달라고 울고, 사랑 달라고 울고, 평화롭게 살자고 우는지도 모른다.
야생 동물들에게 소리는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는 위험천만한 일인데도 짝짓기 철이 되면 더욱 요란한 것 보면 죽음보다 더 강렬한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짝을 애타게 부르는 사랑의 소야곡이었음을 지금에야 알고 나니, 지난날 개구리를 마구 잡았던 일이 무척 무안해진다.
살다 보니 우리 삶도 꼭 개구리들 같다. 아니 개구리보다 못하다. 개구리는 사랑을 노래한다는데 우린 모이기만 하면 싸움질이다. 물러나라. 왜 물러나니 밀고 당기고, 인상하라, 낮춰달라 고함친다. 증원하라, 원점으로 돌려놔라. 밝혀라, 못 밝히겠다. 꼴도 보기 싫다, 제발 눈에 보이지 마라. 누가 언어적 동물 아니랄까 봐 야구장인지 국회인지 공사판인지 성당인지 야단이고 또 법석이다.
개구리 등장하는 한자 성어, 정중지와(井中之蛙), 반와(泮蛙), 와음지성(蛙淫之聲), 춘와추선(春蛙秋蟬)를 보면 모두 개구리를 식견이 좁거나 요란하게 떠드는 실속 없는 존재로 낮잡아 부른다. 선조(蟬조) 와명(蛙鳴)이든 와명 선조든지 지금도 여전히 시끄럽다고 애먼 개구리 탓만 하고 있다. 개구리와 매미가 문제인가. 진짜 돌아봐야 할 것은 조용할 날이 한시도 없는 작금의 우리 모습은 아닐까.
스님들 수행 중 하나가 묵언수행이다. 눈감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고통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말이 많을수록 쓸모 있는 말 또한 없다.
내가 지금껏 하고 있는 말들도 저 논에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보다 더 낫다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
시장 골목은 입구에서부터 요란하다. 꼭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그곳에서 말들이 끊임없이 솟아 나온다. 한시도 갇혀 살 수 없다는 듯 내면에 갇혀있던 언어들이 홍수처럼 골목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 많은 욕망을 저 작은 몸이 어찌 가두고 살았을까. 듣는 이는 없고, 온통 말하는 사람만 있는 것 같은, 마구 흩어져 범벅인 자음과 모음에서 용케도 자신들의 언어를 찾아 듣는 이들도 신기하다. 마치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듣는 것 같다.
도시에서 듣는 개구리 소리는 낯설다. 아파트 인공호수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는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귀가 먹먹할 정도로 그악스럽다. 그렇게 외쳐대는 우렁한 소리가 작은 발소리에도 일시에 뚝 멈추는 것을 보면 도시 사람을 닮아 여간 영악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엄마, 엄마! 나 죽거든♪ 뒷산에다 묻어 주♬, 눈이 오면 쓸어주고♩ 비가 오면 덮어 주?”
유년의 동요와 더불어 어머니의 말이면 거꾸로 실천했던 청개구리. 냇가에 묻어달라는 어미의 유언을 처음으로 실천해서 무덤까지 잃고 마는 청개구리 동화가 꼭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더욱 슬프다.
개골개골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 곧잘 시골 어머니가 떠오른다. 변덕스러운 자식을 죽을 때까지 헤아리는 부모와 달리,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자식의 어리석음을 반어적으로 풍자한 우화. 그 청개구리가 바로 너 아니냐고 개굴개굴, 내게 묻는 것 같다.
소나기처럼 개구리 소리가 시원하게 적셔주는 여름밤이다. 개구리 없는 논은 논이 아니고, 개구리울음 없는 여름밤 역시 여름밤이 아니다. 가을에 구성지게 우는 매미 소리처럼 여름철 무논에서 우는 개구리의 합창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슥한 밤에만 산기슭을 내려오는 빨치산 발소리 같기도 하고, 야심한 밤까지 일하고 돌아온 어머니 한숨 소리 같기도 한, 한동네 처녀와 총각이 몰래 만나 속닥속닥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 밥 달라고 울고, 사랑 달라고 울고, 평화롭게 살자고 우는지도 모른다.
야생 동물들에게 소리는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는 위험천만한 일인데도 짝짓기 철이 되면 더욱 요란한 것 보면 죽음보다 더 강렬한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짝을 애타게 부르는 사랑의 소야곡이었음을 지금에야 알고 나니, 지난날 개구리를 마구 잡았던 일이 무척 무안해진다.
살다 보니 우리 삶도 꼭 개구리들 같다. 아니 개구리보다 못하다. 개구리는 사랑을 노래한다는데 우린 모이기만 하면 싸움질이다. 물러나라. 왜 물러나니 밀고 당기고, 인상하라, 낮춰달라 고함친다. 증원하라, 원점으로 돌려놔라. 밝혀라, 못 밝히겠다. 꼴도 보기 싫다, 제발 눈에 보이지 마라. 누가 언어적 동물 아니랄까 봐 야구장인지 국회인지 공사판인지 성당인지 야단이고 또 법석이다.
개구리 등장하는 한자 성어, 정중지와(井中之蛙), 반와(泮蛙), 와음지성(蛙淫之聲), 춘와추선(春蛙秋蟬)를 보면 모두 개구리를 식견이 좁거나 요란하게 떠드는 실속 없는 존재로 낮잡아 부른다. 선조(蟬조) 와명(蛙鳴)이든 와명 선조든지 지금도 여전히 시끄럽다고 애먼 개구리 탓만 하고 있다. 개구리와 매미가 문제인가. 진짜 돌아봐야 할 것은 조용할 날이 한시도 없는 작금의 우리 모습은 아닐까.
스님들 수행 중 하나가 묵언수행이다. 눈감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고통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말이 많을수록 쓸모 있는 말 또한 없다.
내가 지금껏 하고 있는 말들도 저 논에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보다 더 낫다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