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어느 날의 쇼핑 일기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6월 30일(일) 22:00
두부, 호박, 양파, 버섯, 우유, 바나나, 자두, 그리고 스카프.

오늘의 소비 목록이다. 두부와 호박 등의 먹거리는 가족의 저녁을 위하여, 스카프는 오직 ‘나’를 위하여 구매한 것이다. 먹거리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니 빼놓을 수 없다고 해도, 스카프는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내 옷장에는 얇거나 두껍거나 길거나 짧은 스카프들이 색색이 층을 이루고 있는 데다, 또 다른 스카프가 ‘급하게’ 혹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신경회로는 이미 어떤 강력한 자극에 이끌려 있었다. 문득 눈에 띈 노출 광고 한 컷. 목하 마감날이 다 된 원고를 팽개치고 나도 모르게 낚여 들고 있었다.

오우, 예쁘다. 멋스럽고. 너무 잘 어울리겠는데? 일시에 마음이 흔들렸다. 가격이 좀 비싸면 어때요? 자신을 위해서 이 정도도 못 해요? 죽어라 일만 하면 뭐 하냐구요. 이건 결코 낭비라 할 수 없어요. 아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기회 있을 때 사두시라니까요. 속삭이는 소리도 더욱 은밀해졌다. 누군가 자꾸 종용하는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어쩐지 나를 위한 훈수거나 보상처럼도 느껴졌다. 그 말마따나 망설일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이리저리 재보는 것도 피곤한 일이고…. 과감히 구매하기를 눌렀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한데, 이 야릇한 기분은 뭐지? 약간 허전하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불안하기도 하다. 뭔가에 홀린 듯 갑자기 낯선 느낌이 든다. 혹시 그 지름신?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 순간 번뜩 짚이는 게 있었다. 이미 저질러 놓고야 알다니. 사실 알았다고 해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훈수는 건건이 옳은 말씀이기도 했거니와 특히나 ‘잘 어울린다’는 말씀은 어떤 것보다도 힘이 셌다. ‘지난번에 산 원피스는 목 부분이 너무 파인 게 좀 걸렸는데, 오호! 저 스카프 하나 두르면 완전 어울리겠어.’ 살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을 ‘지름신’이 나서서 깔끔하게 ‘질러’ 주었던 거다. 역시나 그의 위력은 결정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데서 결정적으로 빛이 났다.

세상에는 참 많은 신(神)이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존재는 ‘지름신’이 분명하다. ‘지름신’은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충동적 구매가 제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신에 불과하지만(사실은 억지로 만들어낸 신조어일 뿐이지만), 소비의 영도자로 추앙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영역은 나날이 확장되고 강림의 빈도 또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주변의 크고 작은 상점뿐 아니라 쿠팡이나 아마존, 알리, 테무와 같은 인터넷 쇼핑몰은 ‘지름신’의 전능이 전방위적으로 시전되는 장소다. 세계의 모든 물건을 한 곳에 모아놓고 소비자의 입맛을 유혹하는 기상천외한 기술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이식해 놓았으니, ‘낚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지름신’은 이제 ‘돈신’, ‘물신’과 더불어 우리의 머릿속뿐 아니라 손끝 발끝까지도 장악한 채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다.

문제는 늘 사후에 일어난다. 하지만 그는 사후의 일은 안중에도 없다. ‘지름’의 순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하지 그에 대한 책임은 시종 모르쇠로 일관한다. 모든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전략적으로 누락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달콤하고 은밀하게 오직 ‘지르게’하는 것만 조준할 뿐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남은 뒷감당은 전적으로 ‘지른’ 자의 몫이다. 사고 싶은 걸 샀으니 이제부턴 자네가 알아서 하게나. 하하. 허공 가득히 공허한 웃음만 흘려놓을 뿐이다.

물론 모든 소비가 번번이 후회로 남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것이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분은 기쁨이나 즐거움, 만족감 같은 것만으로 표현될 수 없다. 그것은 화폐와 교환된 일개 상품이 아니라 ‘나’와 새롭게 관계 맺은 생기 가득한 물질로서 기쁨과 슬픔, 사랑, 고뇌, 추억, 아픔 등의 모든 정감과 정동이 스며든 인간적 관계를 형성한다. 개성 있는 존재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삶에 활력을 부여한다. 손때 묻은 가방은 내밀한 개인사의 기록이며, 오래 묵어 낡은 것들은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내일이나 모레쯤 구매한 스카프가 도착할 것이다. 화사한 색감은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고, 밋밋한 목선을 맵시 있게 살려줄 것이며, 체온처럼 따스한 보호벽이 되어줄 것이다. 언박싱의 순간이 은근히 기대된다.

거봐, 지르길 잘했지? 저만치서 ‘지름신’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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