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어느 부대 병장들 이야기 - 박 용 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6월 23일(일) 21:30 가가
야간 사격 중이었다. 최고참 이 병장이 깜깜한 밤에 사격 중이었다.
“야 짜사, 소변보냐? 조준 제대로 하라고! 군기가 빠졌네, 뒈진다.”
그때 뒤에서 고성이 울렸다. 처음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린 목청껏 웃었다. 놀랍게도 갓 들어온 후임병이었다. 신병 유 이병은 언제나 톡톡 튀었다.
평소 나에게 대학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애원하던 고 병장 별명은 ‘대타’다. 그는 면회를 온 여자친구를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걸 알고, 면회소까지 따라온 선임이다. 둘은 나 몰래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은 결과 결혼에 성공했다. 우린 대타, 본인은 지명타자라고 우긴다.
부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정 병장이다. 그는 여차하면 집합시켜 군기를 잡았다. 우린 늘 비상 출동하는 순간이면 정 병장 군장을 먼저 챙겨준 후, 각자 군장을 챙겨 출동했다.
그날 출동은 정 병장이 헉헉거리며 가장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우린 연병장을 열 바퀴 그리고 정 병장은 혼자 열 바퀴를 더 돌았다. 우린 그가 어기적어기적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킥킥거렸다. 그의 군장을 유 이병이 먼저 짊어지고 출동해버린 것이다. 이것도 후임 기수들이 미리 짠 작전이었다. 옆에 전우가 그랬다. 속이 다 시원하다고….
제 군장을 찾지 못해 쩔쩔맸던 정 병장은 지금은 창원 어디서 가게를 한다는 소식만 전했다.
외박 나갈 때면, 늘 짜장면을 사주던 조 병장도 오지 못했다. 총알도 피할 정도로 날렵한 특등 사수이자 그렇게 나라를 위해 소임을 다했던 그도, 췌장암으로 작년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고 먼 하늘나라로 갔다.
울고 왔다가 울고 가는 곳이 군대라는 대학이라더니, 돌이켜보니 참 낭만 가득했던 그리운 순간, 웃픈 시절이었다. 어린애처럼 가기 싫어 엉엉 울고 갔다가, 헤어지기 싫어 부대원들을 붙잡고 엉엉 울며 왔던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제일 웃긴 유 병장은 이번 모임을 주도했다. 호방하고 시원시원했는데, 사업도 그리했는가 보다. 제법 넓은 산에 별장을 지어 초대했다. 덕분에 우리 부대원들은 조 병장을 이곳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도 죽으면 이곳에 모두 묻히기로 했다.
우리 보급부대는 군대에서 필요한 모든 물자를 1종부터 10종으로 분류하여 3군에 제공했다. 그러니 재물점검이 자주 있었다. 대부분 눈치 빠른 병사들은 창고 밑에 비밀 창고를 파서 사용했다. 곧 부사관이나 장교도 모르게 물건을 감추었다가 부족하면 채우곤 했다. 군화 군복은 물론이려니와 총알에서 탱크까지 여간 쉽잖은 일이었다. 그때 터득한 각자 노하우, 즉 자기 영업 비밀을 주고받는 사이 웃음이 넘쳤고 그렇게 다시 군인이 되었다.
건배사도 그때처럼 ‘공수래’ 하면 ‘공수거’이다. 입대할 때 맨몸으로 온 것처럼, 전역할 때도 부대 값진 물품을 잘 관리했다가 물려주고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집합과 구타가 수시로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학력이나 지역 차별은 없었다. 그렇게 우린 군에서 3년 동안 햇병아리가 튼실한 수탉이 되듯, 신병에서 선임자로 이방인에서 동료로 그리고 젊은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였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는 축구 이야기만큼이나 지겹다고들 한다. 사실 난 영장이 나오지 않아 해병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해병대 입대 딱 1주일 전에 육군 입소 영장을 받았다. 좋아서 가는 곳도 아니어서 곧장 광주역에서 머리 깎고 입영열차를 탔다.
그렇게 내가 부임한 곳이 부평의 한 병참부대였다. 지금도 40여 년 전 그 전우들과 만난다. 그들을 만나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 속에 내 모습, 내 청춘이 오롯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우린 고향이나 대학, 종교나 이념이 달랐지만 언제나 국가와 민족 앞에서 하나였다. 계급장을 떼고 난 지금도 그 전우애는 여전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곳이 군대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을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군 복무를 꼽을 것이다.
학문과 취업으로 고민하는 가운데도 조국애를 잃지 않았던 사나이들의 우정과 웃음꽃이 활짝 핀 때였다.
거기 오래 머물러 있거라. 우리의 청춘, 3군지사 18보급대. 그 웃음소리가 반백 년을 뚫고 남도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야 짜사, 소변보냐? 조준 제대로 하라고! 군기가 빠졌네, 뒈진다.”
그때 뒤에서 고성이 울렸다. 처음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린 목청껏 웃었다. 놀랍게도 갓 들어온 후임병이었다. 신병 유 이병은 언제나 톡톡 튀었다.
부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정 병장이다. 그는 여차하면 집합시켜 군기를 잡았다. 우린 늘 비상 출동하는 순간이면 정 병장 군장을 먼저 챙겨준 후, 각자 군장을 챙겨 출동했다.
외박 나갈 때면, 늘 짜장면을 사주던 조 병장도 오지 못했다. 총알도 피할 정도로 날렵한 특등 사수이자 그렇게 나라를 위해 소임을 다했던 그도, 췌장암으로 작년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고 먼 하늘나라로 갔다.
울고 왔다가 울고 가는 곳이 군대라는 대학이라더니, 돌이켜보니 참 낭만 가득했던 그리운 순간, 웃픈 시절이었다. 어린애처럼 가기 싫어 엉엉 울고 갔다가, 헤어지기 싫어 부대원들을 붙잡고 엉엉 울며 왔던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제일 웃긴 유 병장은 이번 모임을 주도했다. 호방하고 시원시원했는데, 사업도 그리했는가 보다. 제법 넓은 산에 별장을 지어 초대했다. 덕분에 우리 부대원들은 조 병장을 이곳으로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도 죽으면 이곳에 모두 묻히기로 했다.
우리 보급부대는 군대에서 필요한 모든 물자를 1종부터 10종으로 분류하여 3군에 제공했다. 그러니 재물점검이 자주 있었다. 대부분 눈치 빠른 병사들은 창고 밑에 비밀 창고를 파서 사용했다. 곧 부사관이나 장교도 모르게 물건을 감추었다가 부족하면 채우곤 했다. 군화 군복은 물론이려니와 총알에서 탱크까지 여간 쉽잖은 일이었다. 그때 터득한 각자 노하우, 즉 자기 영업 비밀을 주고받는 사이 웃음이 넘쳤고 그렇게 다시 군인이 되었다.
건배사도 그때처럼 ‘공수래’ 하면 ‘공수거’이다. 입대할 때 맨몸으로 온 것처럼, 전역할 때도 부대 값진 물품을 잘 관리했다가 물려주고 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집합과 구타가 수시로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학력이나 지역 차별은 없었다. 그렇게 우린 군에서 3년 동안 햇병아리가 튼실한 수탉이 되듯, 신병에서 선임자로 이방인에서 동료로 그리고 젊은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였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는 축구 이야기만큼이나 지겹다고들 한다. 사실 난 영장이 나오지 않아 해병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해병대 입대 딱 1주일 전에 육군 입소 영장을 받았다. 좋아서 가는 곳도 아니어서 곧장 광주역에서 머리 깎고 입영열차를 탔다.
그렇게 내가 부임한 곳이 부평의 한 병참부대였다. 지금도 40여 년 전 그 전우들과 만난다. 그들을 만나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 속에 내 모습, 내 청춘이 오롯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우린 고향이나 대학, 종교나 이념이 달랐지만 언제나 국가와 민족 앞에서 하나였다. 계급장을 떼고 난 지금도 그 전우애는 여전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곳이 군대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을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군 복무를 꼽을 것이다.
학문과 취업으로 고민하는 가운데도 조국애를 잃지 않았던 사나이들의 우정과 웃음꽃이 활짝 핀 때였다.
거기 오래 머물러 있거라. 우리의 청춘, 3군지사 18보급대. 그 웃음소리가 반백 년을 뚫고 남도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