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광주, 완전한 카타르시스를 위하여 - 정은영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획운영과장
2024년 06월 12일(수) 00:00 가가
지난 6월 1일 연세대학교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에서 ‘오월 어머니의 노래’가 막을 내렸다. 오월 어머니들이 가슴에 묻은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낸 공연이었다. 어머니들의 피 끓는 무대에 나는 기립박수를 헌정했다. 나는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 후 광주를 떠나왔다. 올해 30여년 만에 광주에 돌아와 처음으로 광장과 극장, 전시장에서 온전히 5월 광주를 보았다.
오월극은 살아 있었다. 5월 18일, 518번 버스를 소재로 펼쳐낸 극단 토박이의 ‘버스킹 버스’를 보면서 오월 연극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했다. 5월 19일에는 민주광장 천막 무대에서 만난 극단 신명의 마당극 ‘언젠가 봄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작품의 존재를 안 것은 작년 광주비엔날레, 알리자 니센바움(Aliza Nisenbaum)의 그림에서였다. 5월의 햇빛이 작렬했지만 박조금, 시민군, 백구두, 여학생 등 역할에 몰입한 배우들의 에너지는 민주광장을 뚫고 나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무대에서 본 체험극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나는 광주에 없었다. 하지만 80년 오월의 광주를 기억하겠다”는 나의 다짐이 되었다.
오월의 춤 무대는 아름다웠다. 5월 24일 광주시립발레단의 현대발레 ‘디바인(Divine)’. 무대 전체에 흩뿌려지는 검은 재를 보며 슬픔의 역사에 침잠했고 흰 종이배가 창문으로 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5·18이 쏘아 올린 민주주의의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5월 28일, 마임이스트 유진규, 지신무 서승아, 소리의 김평부가 펼치는 ‘아직도 오일팔’은 완전한 해원(解寃)을 위한 융복합 퍼포먼스였다.
‘너의 5월을 들려줘’의 음악인들은 매일 밤 5·18 민주광장 무대를 밝혔다. 싱어송라이터 하림은 5·18 유공자 외삼촌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그는 ‘비긴어게인’의 무대가 아닌 이곳 광장에서 진지하게 슬픔을 노래하는 ‘우리’가 되었다. 전일빌딩과 은암미술관에서는 오월 미술제가 열렸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는 ‘기억지도-금남로의 예술가들’이 열렸다. 김남주, 정세현 등 오월을 ‘삶의 심장’으로 살아낸 예술가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였다.
남동 5.18 기념성당의 추모 미사는 파격이었다. 입당송 ‘임을 위한 행진곡’, 파견송 ‘광주출정가’는 죽은 자를 추모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힘을 주는, 종교적 제의를 뛰어넘어 한 편의 숭고한 퍼포먼스였다. 클라이맥스는 5월 26일 밤에서 5월 27일 새벽으로 이어지는 최후항쟁의 시간이었다. 예술가들의 새벽광장 무대는 비장했다. 기타리스트 박성언 등 젊은 음악인 그룹은 5.18 유적지를 돌며 새벽송을 불렀다. 5월 27일 자정, 극단 신명은 도청을 지킨 새벽 전사 14인을 위한 해원의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5월을 보내며, 나는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떠올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보며 우리는 마음에 쌓였던 우울과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한다’고 했다. 내게 오월의 예술은 프로파간다의 선전이 아니라, 카타르시스를 위한 예술의 최전선이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 희생에 대한 연민을 넘어 슬픔 안에 깃든 깊고 고귀한 것을 알아차리는 카타르시스의 체험.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한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를 보며 슬픔과 비탄과 아울러 숭고함과 정화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슬픔을 동무하며,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 그 현장이 5월 광주에 있다. 광주의 예술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산증인이다. 나는 오월 광주가 함께하는 축제, 완전한 카타르시스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축제가 열리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의, 슬픔을 끌어올려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의 축제였으면 좋겠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나는 광주를 찾을 것이다. 온전히 슬픔에 머물며, 카타르시스의 자유와 해방감으로 남은 나의 삶을 ‘찬란하게’ 살아내기 위하여.
남동 5.18 기념성당의 추모 미사는 파격이었다. 입당송 ‘임을 위한 행진곡’, 파견송 ‘광주출정가’는 죽은 자를 추모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힘을 주는, 종교적 제의를 뛰어넘어 한 편의 숭고한 퍼포먼스였다. 클라이맥스는 5월 26일 밤에서 5월 27일 새벽으로 이어지는 최후항쟁의 시간이었다. 예술가들의 새벽광장 무대는 비장했다. 기타리스트 박성언 등 젊은 음악인 그룹은 5.18 유적지를 돌며 새벽송을 불렀다. 5월 27일 자정, 극단 신명은 도청을 지킨 새벽 전사 14인을 위한 해원의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5월을 보내며, 나는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떠올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보며 우리는 마음에 쌓였던 우울과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한다’고 했다. 내게 오월의 예술은 프로파간다의 선전이 아니라, 카타르시스를 위한 예술의 최전선이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 희생에 대한 연민을 넘어 슬픔 안에 깃든 깊고 고귀한 것을 알아차리는 카타르시스의 체험.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한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를 보며 슬픔과 비탄과 아울러 숭고함과 정화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슬픔을 동무하며,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 그 현장이 5월 광주에 있다. 광주의 예술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산증인이다. 나는 오월 광주가 함께하는 축제, 완전한 카타르시스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축제가 열리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의, 슬픔을 끌어올려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의 축제였으면 좋겠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나는 광주를 찾을 것이다. 온전히 슬픔에 머물며, 카타르시스의 자유와 해방감으로 남은 나의 삶을 ‘찬란하게’ 살아내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