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하다, 타인의 옷을 탐하는 자여! -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4년 06월 10일(월) 00:00
요즘 타인의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한 고전 속 한 장면을 자주 생각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탐하는 행위의 의미를 응축된 몇 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헥토르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자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트로이의 왕자다. 이 헥토르 진영은 제우스 신의 도움으로 이제 막 트로이 전쟁에서 결정적 승세를 타는 참이다. 이때 헥토르가 상대 진영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고 나타난다. 당연하지만 자신에게 무구가 없거나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분노한 영웅 아킬레우스가 싸우기를 계속 거부하자,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부하인 파트로클로스가 대신해서 싸우러 나간다. 이때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고 나간 것이다. 자신을 누구나 두려워하는 아킬레우스로 믿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고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은 것이다. 이런 헥토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헥토르가 선택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헥트로가 먼저 생각한 것은 자기 진영의 사기 문제였고 공동체의 운명이었지만, 개인의 명예심과 영웅심도 있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신의 솜씨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들 무구는 분명 물건이다. 물건은 쓰임새와 다루는 사람에 의해서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이 무구가 스스로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영웅이 무구의 가치와 상징성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헥토르가 비록 이 최고의 무구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곧 자신은 무구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운명을 미리 아는 제우스는 탄식한다.

“가련하다!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너는 죽음을 생각지도 않는구나.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 떠는 가장 용감한 전사의 불멸의 무구들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제우스의 탄식은 한낱 인간인 헥토르가 불멸을 상징하는 무구를 욕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제우스는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경계를 넘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중심을 잃은 판단과 절제력을 잃은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는다고 해서 아킬레우스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하다.

왜 헥토르는 굳이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었을까? 자신은 ‘예외’라는 확신에서다. 자신은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는 확신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자신을 늘 예외로 인식하는 태도에는 자신의 ‘절대적 예외성’을 향한 욕망의 의지가 작용한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예외인가 하는 것이다. 예외를 즐겨 만드는 사람은 보편적 범례와 규칙을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신은 특별한 능력과 권한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칙에 지배받지 않는 예외가 있는가? 결코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는 예외적 결정과 선택을 주저하지 않지만 이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헥토르의 결정은 요즘 난무하는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예외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헥토르는 공동체적 입장에서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지만 우리가 지겹게 보는 현실의 ‘자기 예외’는 하나같이 비루하고 천박한 합리화와 참담한 무지의 맹목성에서 나온다.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상징하고 은유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한계와 무지의 맹목에 대한 각성의 요구이다. 감당하지 못할 무구(옷)에 대한 절제 없는 욕망의 질주는 결국 욕망하는 자인 우리 자신을 파괴한다. 자신은 ‘예외’라고 믿는 사람, 자신을 위한 예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예외를 규칙으로 만들며 예외가 상례가 되게 한다. 이는 위험하고 무지한 것이 거울 없는 닫힌 방에 혼자 사는 것과 같다. 거울 없는 방에는 오직 나 자신만 있어서, 외부로 나와 연결되는 관계의 가치에 대해서 결코 돌아볼 수 없다. 이 방에는 오직 자신을 향한 자신의 시선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위한 무도한 예외가 ‘예외’로 인식되지 않는 닫힌 방이다. 거울 없는 방에 사는 자, 그래서 감당 못 할 타인의 옷을 함부로 탐하는 자여, 가련하다! 이들이 누구라고 한들 자신만을 위한 비루한 ‘예외’에 누가 함께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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