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절망 속에 핀 꽃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6월 10일(월) 00:00
내려간다. 깊숙이 아래로 간다. 한밭 지나 너릿재 넘어서, 저기 땅의 끝까지 가볼 참이다. 강진과 해남을 가로질러 거기 남도의 모서리, 끝으로 간다. 꿈이 꺾였으니 희망은 없다. 절망 가득 윤선도가 되고 정약용이 되어 내려간다.

얼마 전, 통증이 재발했다. 아파보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른다. 깨진 뼛조각이 가슴을 찌른다. 앞이 캄캄해진다.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없다. 고통을 참고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초대에 응했다. 졸업 30주년, 행사는 유쾌했으나 술이 과했는가 보다. 한 녀석은 왜 강제 야간자습을 시켰냐고 하고, 또 한 녀석은 왜 체벌했느냐고 따졌다. 이리 좋은 동창회에 무슨 행패냐고 아이들이 막아섰지만 틀리지 않는 말. 애초 가지 말았어야 했다.

망가진 몸에 정신적 공황까지, 막막하다. 꿈이 절망으로 바뀔 때 더 슬프다. 곧 좋아지겠다는 의사의 말도 없다.

삶은 언제나 절망뿐이었던 것 같다. 희망이 들어올 틈이라곤 없다. 주변을 돌아보니 절망이 철조망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 절망을 없앨 수는 없을까. 있다. 딱 하나. 그것은 나를, 내 몸을 천길만길 절벽에 던지는 일이다. 절망을 던지려고 나는 간다. 땅끝 어느 절벽에서 절망을, 아니 나를 던지리라.

세상도 절망뿐이다. 전태일과 5.18이 그랬고 세월호와 김용균이 그랬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시 절망이 내는 소리다. 세상 구석구석 절망으로 가득하다.

혹여 어쩌다 희망을 꿈꾸면, 그 순간 녀석도 여지없이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절망하려는 순간, 녀석은 맹렬하게 일어났다. 절망은 그렇게 절망을 먹고 살았다. 그 지긋지긋한 절망을 버리러 절망에게 간다.

그래 그와 함께 절벽에 선다. 저 시커먼 절벽 아래, 시커먼 파도를 본다. 그를 붙들고 하소연한다.

‘제발 좀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그리고 녀석과 함께 뛰어내린다. 같이 죽는 거다. 그때였다. 녀석이 내 귀에 속삭인다.

“뛰어내리려면 뛰어내려 봐! 네가 찾는 희망은 나랑 일란성 쌍둥이거든”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선다. 녀석을 똑바로 본다.

땅끝은 우리가 명명한 끝일 뿐, 이곳의 끝이 아닌 저곳의 시작이었다. 진짜 끝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물속으로 섬들과 끈끈하게 손을 잡고 있다. 그가 잡은 것은 끝이 아니라 내가 찾던 희망이었다.

까만 나팔꽃 씨의 속살이 하얗듯, 저 검은 절망 속에는 순백의 희망이 숨어 있었구나. 전태일과 김용균이 절망이 아닌 수많은 노동 해방이란 희망의 씨앗이었음을, 5.18의 피가 민주화의 꽃이었음을, 그토록 내가 찾던 희망은 바로 그 절망 속에, 그 포장지에 싸여있었음을 본다.

절망을 쫓아내면 희망도 달아나고, 희망을 좇으면 절망도 따라온다. 미움 없이 사랑 없듯이, 절망 없는 희망도 없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희망도 그토록 멀리한 절망도 한 몸, 한 가지다.

꿈 없는 사람은 절망조차 없고, 꿈 있는 사람만이 절망한다. 절망은 조연, 주인공은 언제나 희망이었다.

녀석들을 헤아려본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데 야간자습이 되겠는가. 까짓 방황 좀 했기로서니 두들겨 팼으니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 절망들을 껴안는다. 녀석들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망을 모르는 사람이 절망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절망해 본 사람만이 절망이 절대 희망의 줄임말임을 안다. 그 절망의 밑까지, 저 뿌리 끝까지 내려간다. 그 끝에 작은 불빛 하나가 마중 나온다.

이제 온 길을 거슬러 오른다. 미소 가득, 발걸음도 가볍다. 저 나락 밑에서 깨진 뼛조각 같은 절망을 데리고 올라온다. 절뚝절뚝 희망도 다리를 절며 따라온다. 이제 살 일만, 좋아질 일만 남았다. 절망 속에 핀 꽃, 절망이 껴안고 있는 것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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