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남도 유배지를 찾아서
2024년 05월 27일(월) 19:55
외딴 섬 고뇌의 시간들, 문학·예술로 승화하다
정약용, 18년간 강진에서 ‘목민심서’ 등 600여 권 집필
조선 화가 조희룡,임자도서 2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려
삼봉 정도전 민본사상을 키워 낸 나주 운봉리 백동마을

다산초당 안에 다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1801년 11월. 나주 북쪽 주막거리의 율정 주막에서 손암 정약전, 다산 정약용 두 형제는 마지막 이별을 하였다. 천주교도에 대한 피바람이 불었던 ‘신유박해’로 유배를 떠났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한차례 더 죽음의 고비를 견디고 새로운 유배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곳에서 형 약전은 무안을 지나 흑산도로, 아우 약용은 월출산 아래 강진으로 기약없는 유배길을 떠났다.

그 옛날 조선시대에 유배는 흔한 형벌이었다. 사대부 가운데 4분의 1이 유배를 경험했다고 전해오는데, 당파를 달리하는 정치적 라이벌 탄압 등에 악용돼 정권이 바뀌면 유배와 해배가 교차되는 일이 허다했다.

제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단골 유배지였다. 외딴섬이 있는 신안과 진도, 완도, 해남, 고흥, 강진에 집중됐다. 수백년 시공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는 전남의 유배지를 찾아가본다.

다산이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갔던 백련사 오솔길.


◇조선 실학 집대성한 다산초당과 백련사 오솔길=정약용은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18년의 세월을 남쪽 바닷가 외진 땅 강진에서 보냈다. 강진에 처음 도착해 머문 곳은 주막이었다. ‘죄인 정약용’을 무서워하고 반기지 않던 분위기 속에서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주막 주인의 배려로 뒷방에 머물 수 있었다. 정약용은 이곳을 ‘네 가지를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의재’라 불렀다. 이곳에서 그는 4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고 ‘경세유표’, ‘애절양’을 집필했다.

정약용은 사의재에서 나와 보은산 중턱에 자리한 고성사에서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제자들을 교육하며 52편의 시를 남겼다. 도암면 귤동마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긴 건 1808년 봄, 이곳에서 유배 해제까지 10여 년을 머물며 제자들을 교육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했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주차장에서 1㎞ 거리에 불과하지만 산길이라 제법 숨이 차다.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은 ‘뿌리의 길’로 불리는데, 땅 위에 솟은 나무의 뿌리 때문에 길이 미끄럽다.

다산초당은 본래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 노후로 붕괴되었다가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지금의 목조 와가로 복원했다. 초당은 외가인 해남 윤씨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1000여 권의 장서까지 갖춰놓은 가문의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정약용은 이곳을 서재로 사용하고 초당 옆 동암을 숙소로 사용했다. 동암 옆에는 멀리 강진만과 칠량, 천관산이 바라보이는 천일각이 자리한다. 천일각은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이다. 정조대왕과 흑산도로 유배간 형 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곳에 서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이 새로 세웠다.

천일각 왼편에 백련사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혜장은 해남 대둔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 경지에 감탄해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했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겼다.

신안군 임자면 이흑암리의 우봉 조희룡 유적지(적거지).
오솔길이라고 해서 얕봤다간 큰 코 다친다.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수시로 교차한다. 800여m 이어지는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다산초당 인근 도암면에는 다산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18년 유배생활 동안 강진에 남겨진 흔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으로, ‘목민심서’ ‘흠흠심서’ 필사본, 아들 정학연을 포함한 가족과 주변 인물들 사이의 친필 서간 등 유물 300여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정약용에 비해 형 약전의 유배생활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정약전은 소흑산도(우이도) 진리에서 9년, 대흑산도(흑산도) 사리에서 7년을 지냈다. ‘사촌(沙邨)서당’에서 섬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역민들과 어우러져 살았다. 정약전은 이곳에서 청년 어부의 도움을 받아 바닷 속 어종을 정리한 ‘자산어보’를 완성하기도 했다. 유배 16년째 되던 181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 동생 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신안 흑산도에 있는 정약전 사촌서당 전경. <신안군 제공>
◇우봉 조희룡이 사랑했던 임자도 이흑암리=신안의 외딴섬이었던 임자도는 1711년 임자도 진이 설치된 이후 많은 인물들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지난 2021년 3월 신안군 지도와 임자도를 잇는 임자대교가 개통되면서 뭍과 이어져 있지만 과거에는 한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 힘든 척박한 환경이었다.

조선 말기 화가였던 우봉 조희룡(1789~1866)은 1851년 예송논쟁(禮訟論爭·효종 사후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벌어진 서인·남인 간 논쟁) 여파로 임자도에 유배조치 됐다. 63세의 나이였다. 1853년 해배될 때까지 2년여 동안 이흑암리 바닷가 마을에서 살았던 그는 섬 주민들과 친숙한 교류관계를 유지했다. 자신이 생활했던 마을 적거지에 ‘만구음관(萬鷗吟館)’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짖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조희룡은 2년 유배생활을 했던 임자도를 사랑했다고 전해온다. 자신의 산문집 ‘화구암난묵’에 임자도에서 ‘삼절(三絶)’을 얻었다고 기록했는데 ‘작도의 가을새우’, ‘흑석촌의 모과’, ‘수문동의 밝은 달’이다.

2년동안 하루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그린 ‘홍매대련도’는 빼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당호가 있는 그의 그림 19점 중 ‘황산냉운도’, ‘홍백매팔연폭’ 등 8점이 유배지에서 나올 정도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임자면 이흑암리 적거지를 찾아가려면 내비게이션에 ‘우봉조희룡유적지’로 검색하면 된다. 마을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마을 언덕 위로 깔끔하게 조성된 유적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십그루의 매화나무로 둘러싸인 초가가 복원돼 있으며 초가 아래 공원에는 ‘괴석도’, ‘목죽도’, ‘국화도’ 등 조희룡의 대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마을 입구에는 적거지 표지석과 조희룡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조희룡의 작품을 좀 더 감상하고 싶다면 10여분 거리 대광 해수욕장에 조성된 ‘조희룡미술관’을 찾으면 된다. 조희룡기념관을 리모델링해 재개관한 곳으로 조희룡의 작품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나주 다시면 백동마을에 조성된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
◇삼봉 민본사상 키워낸 나주 운봉리 백동마을=나주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은 고려 말 정치가이자 성리학자였던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유배지다. 고려 당시에는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이라 불리는 촌락이었다. 앞서 다산초당이나 임자도 조희룡 유적지만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삼봉의 민본사상을 키워낸 곳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곳이기도 하다.

충청도 단양 삼봉 출생인 정도전은 부친 정운경을 따라 개경에 와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 등과 유학을 배웠다. 22살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고 1370년 스승 이색이 대사성이 되면서 성균관 박사가 된다. 친명파인 정도전은 1374년 공민왕의 죽음으로 친원파였던 이인임의 미움을 받게 되고, 이듬해 원나라의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나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정도전은 유배생활 초기 소재동 농부 황연의 집 한 칸에 세들어 살았다가 이후 뒤쪽 백룡산 아래에 자그마한 초가를 지어 3년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도전은 백성들의 고통을 눈으로 확인했으며 농민들의 인심에 감동받아 ‘소재동기’를 남긴다. 유배지에서 백성들과 함께 생활했던 경험은 이후 ‘백성이 먼저’라는 민본 사상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백룡산 아래 백동마을의 초가는 지난 2010년 복원됐다. 본래의 집은 사라졌다가 1988년 나주시가 ‘회진현 소재동이 백룡산 기슭에 소재’ 했음을 확인하고 뒤늦게 복원에 나섰다. 마루에는 회진현에 유배된 이듬해 추석이 지은 ‘중추가’가 걸려 있다.

/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광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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