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어른, 오방 최흥종- 서순복 호남영성연구원 이사장, 조선대 법학과 교수
2024년 05월 26일(일) 22:30 가가
우리 사회는 부인할 수 없는 다민족·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결혼이주여성이 만들어준 다문화가족이 상당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다문화가족 자녀들이 엄마한테 학교 숙제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한국어에 서툴고 한국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다문화 엄마는 힘들어한다. 낯선 이국 땅 한국에 시집와서 나이 차이가 있는 남편에게 홀대받는 것은 둘째로 치고 아이들이 엄마를 무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또한 평동공단에 불법취업한 외국인근로자가 낳은 아이들의 취학문제와 아이들이 아플 때 의료보험 등 병원문제도 있다.
광주 월곡동에는 고려인마을이 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디아스포라로 해외로 이주해 고생했던 독립운동가들 후손이 구소련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에 까레이스키로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고 탈북 새터민들이 광주에도 많이 살고 있다.
광주는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인권은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이다. 이 시대와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사회취약계층으로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이외에도 다문화가족이 있다.
문화는 흐르고 교류는 계속된다.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풍장 터였던 양림동에 선교 둥지를 틀고,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세워 교육과 의료와 선교에 헌신하였다. 광주에서 열린 첫 예배인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했던 최흥종은 서양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그들이 세운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고 과거의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삶의 일대 전환을 이루게 된다. 1909년 목포 선교부에 있던 포사이드 선교사를 마중 나갔던 영산포에서, 다리 밑에 거적때기를 쓰고 진물이 흐르는 한센인 나병환자를 발견한 서양 선교사는 타고가던 말에서 내려 그 여인을 태우고 여인의 지팡이를 짚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최흥종은 나병에 옮을까 봐 순간 주저하였다. 이것이 최흥종 회심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후에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인 나환자를 섬기는 사역에 최흥종 목사는 헌신하게 된다. 봉선동 일대에 자신의 땅 1000여 평을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을 위한 부지로 기부하고 나병 퇴치를 위한 운동 조직에 관여했다. 광주의 첫 장로이자 최초의 목사였던 최흥종은 나환자 병원 건립을 위해 광주에서 서울의 조선총독부까지 나환자들과 함께 도보 행진을 벌였다. 행진에는 전국에서 나환자 500여 명이 집결해 결국 조선총독부를 굴복시켜 소록도에 나환자 전문병원 건립 허가를 받아내었다.
최흥종 목사는 인생 후반부에 거세 수술을 하고 자신은 죽었다고 사망 통지문을 보내면서 일체의 대외사업을 접고 오로지 빈민구제와 나환자와 결핵환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1966년 5월 18일에 광주시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10만여 명이 몰렸고 특히 거지와 결핵과 나병에 걸린 환우들이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했다고 하니 최흥종 목사는 희생과 배려와 섬김에 기반한 광주정신의 원형이며 ‘광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오방 최흥종은 광주 시민사회단체의 맏형 격인 광주 YMCA를 창립하였고 3·1운동의 광주 책임자였으며, 좌·우 합작 성격을 지니는 신간회의 광주 책임자로 좌우를 함께 아울렀다는 점에서 통일조국의 미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40여 년 전 군사반란 세력이 주도한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과 생명이 유린된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 땅의 민주화 제단에 피를 흘려 민주주의 초석을 다졌다. 아직 5·18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지 않았고 배상과 보상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일 동안의 민주 해방구에 형사사건 하나 없고 주먹밥 공동체와 헌혈과 분수대 학습동아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5·18 정신은 그 때 참여 못한 사람들의 무거운 부채의식 속에 전국화와 세계화는 여전히 더디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일제 강점기 때 가장 소외된 나환자와 결핵환자, 걸인들을 섬기며 복음주의적 사회사업을 펼쳤던 시대의 어른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가 더욱 그리워진다. 최흥종 목사의 환대의 영성이 광주정신 못자리의 줄기가 아닐까 한다.
이후에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인 나환자를 섬기는 사역에 최흥종 목사는 헌신하게 된다. 봉선동 일대에 자신의 땅 1000여 평을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을 위한 부지로 기부하고 나병 퇴치를 위한 운동 조직에 관여했다. 광주의 첫 장로이자 최초의 목사였던 최흥종은 나환자 병원 건립을 위해 광주에서 서울의 조선총독부까지 나환자들과 함께 도보 행진을 벌였다. 행진에는 전국에서 나환자 500여 명이 집결해 결국 조선총독부를 굴복시켜 소록도에 나환자 전문병원 건립 허가를 받아내었다.
최흥종 목사는 인생 후반부에 거세 수술을 하고 자신은 죽었다고 사망 통지문을 보내면서 일체의 대외사업을 접고 오로지 빈민구제와 나환자와 결핵환자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1966년 5월 18일에 광주시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10만여 명이 몰렸고 특히 거지와 결핵과 나병에 걸린 환우들이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했다고 하니 최흥종 목사는 희생과 배려와 섬김에 기반한 광주정신의 원형이며 ‘광주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오방 최흥종은 광주 시민사회단체의 맏형 격인 광주 YMCA를 창립하였고 3·1운동의 광주 책임자였으며, 좌·우 합작 성격을 지니는 신간회의 광주 책임자로 좌우를 함께 아울렀다는 점에서 통일조국의 미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40여 년 전 군사반란 세력이 주도한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과 생명이 유린된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 땅의 민주화 제단에 피를 흘려 민주주의 초석을 다졌다. 아직 5·18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지 않았고 배상과 보상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일 동안의 민주 해방구에 형사사건 하나 없고 주먹밥 공동체와 헌혈과 분수대 학습동아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5·18 정신은 그 때 참여 못한 사람들의 무거운 부채의식 속에 전국화와 세계화는 여전히 더디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일제 강점기 때 가장 소외된 나환자와 결핵환자, 걸인들을 섬기며 복음주의적 사회사업을 펼쳤던 시대의 어른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가 더욱 그리워진다. 최흥종 목사의 환대의 영성이 광주정신 못자리의 줄기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