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피 한 방울의 무게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5월 13일(월) 00:00
왼손 중지 끝에 피 한 방울이 이슬처럼 맺혔다. 주삿바늘이 찌르자마자 툭 튀어나온 피가 시붉다. 채혈을 마친 그 피는 금세 먹빛으로 바뀐다.

멀리서 빨간 풍선이나 빨간 우체통, 빨간색만 보아도 깜짝깜짝 놀라는 나는 헌혈하는 시간보다 따끔한 채혈 순간이 더 두렵다. 그 두근거림은 지금도 어쩔 수 없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피 피 피!”

1980년 5월 17일 아침도 그랬다. 대학생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곤봉을 휘두르자 달아나던 대학생 머리에서 분수처럼 붉은 피가 솟아났다. 머리를 감싸고 쓰러진 그를 또 다른 군인들이 군홧발로 세차게 짓밟았다. 등굣길 1번 시내버스에서 바라본 이른 아침 참상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옷과 도로 여기저기 붉은 피가 낭자했다. 도저히 볼 수 없는 잔혹함이었다.

무서웠다. 그 핏방울은 그들 의도였는지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발도 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교실에 도착하니 다른 친구들도 보았다며 웅성대고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힘을 모으기로 했다. 모두 분노하며 단단히 뭉쳤다. 교실마다 책걸상을 뒤로 밀치고 긴급 토론을 한 후 시내로 진입하자고 결의했다. 총검을 앞세운 그들과 싸울 정의감이 훨씬 강했다. 아쉽게도 눈치를 챈 학교에서 일찍 하교하는 바람에 우리 대오는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21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손수레에 실려 터미널에서 금남로로 온 두 구의 시신, 그 시신을 덮고 있던 태극기에 번진 피, 그 선혈이 섬ㅉㅣㅅ했다. 그 피는 시민을 또다시 흔들어 깨웠다. 붉다 못해 검게 변해버린 피 한 방울, 우린 그 잔혹함에 또 한 번 치를 떨었다. 그리고 그 핏빛 태극기를 흔들며 분연히 연대의 거리로 나섰다. 44년 전의 일이다.

간혹 난 그날의 오월과 지금 오월을 비교해 보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만약 그때처럼 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명을 내린다면 어떨까. 지금 군인들은 당연히 그리고 단호하게 거부할 것이다. 설사 그 만행에 동참했더라도 요즘 군인들은 거리낌 없이 양심선언에 앞장설 것이다.

명령보다 더 우선인 것이 법이고 정의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게 바로 44년 전 광주로 인해 우리가 새로 만든 법치이자 패러다임이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피! 피! 피!”

오월 그날은 뜨겁게 피가 끓었다. 최전선에서 싸운 젊은이들에게 어른들은 돌을 날라주었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해주었다. 여학생들은 병원으로 달려갔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숨겨주었다. 헌혈해 달라는 말에 시민들은 줄을 섰다.

도청 대학생의 머리에서 터져 나온 피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어 시민의 가슴으로 번지고 세 방울로 금남로와 상무관으로 흘러내려 도시 전체를 도도한 해방구로 붉게 물들였다.

그 5월 피 한 방울은 제단에 바친 헌신이나 굴종의 피가 아니었다. 5월이면 해마다 부활한 피였으며, 도청과 금남로에서 그리고 서울과 대전과 부산, 곳곳으로 울려 퍼진 피였다.

그 피 한 방울은 일어섬과 맞섬의 피였으며 6월 항쟁의 의로움을 향한 올곧은 나아감의 피였다. 어둠을 물리친 6·29 항복을 받아낸 새로운 밝음을 여는 그런 역사를 바꾼 생피였다.

꽃들이 만발한 5월, 살만한 세상이 되었지만 구석구석 살펴보면 그늘이 적지 않다. 오월은 그래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흙탕물에 쓰러져간 부하 한 명의 피 한 방울일지라도 그냥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박정훈 대령을 보면서 피 한 방울의 무게를 본다. 폐지를 줍는 노인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이주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등, 우리 곁에서 조용히 의로움을 실천하는 수많은 의인의 가슴으로 이어져 핀 피다. 그 뿌리는 5월 정신, 피 한 방울의 정신이 아닐까. 오월의 피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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