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봄’을 앞당기려 한 ‘전국의 5·18들’ - 박진우 5·18기념재단 사무처장
2024년 05월 10일(금) 00:00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 한편을 뽑는다면 단연 ‘서울의 봄’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과 다르게 1980년 5월의 광주는 ‘봄’이 아니라 ‘참혹한 겨울’이었다. 5·18, 열흘간의 항쟁 이후 광주의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광주·전남의 지역민들에게 그것은 ‘영원한 상처’이자 ‘가장 오래 기억된 피멍’으로 남았다.

광주가 외롭지 않았던 건 1980년 5월 광주에는 없었지만, 그 후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5·18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수많은 ‘전국의 5·18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민중항쟁 44주기인 올해 오월에도 전국에서 5·18을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이들이 광주를 방문하고 있다. 40년 전인 1984년과 1985년 전국의 대학가에서 진행됐던 ‘5·18’은 연대의 힘을 보여주었고,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힘을 모아줬던 ‘그날’의 현장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건 의미있는 일이다.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고 1984년 한국에 최초로 교황이 방문하기 전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5·18 이후 3년 7개월 만에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과 교수들의 복직이 허용되었으며 대학 내 상주하던 경찰들이 공식적으로 철수하게 됐다. 이런 조치는 광주의 진실에 대한 갈망이 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각 대학에서는 5·18 4주기를 전후로 다양한 활동이 펼쳐지게 된다.

고려대에서는 1984년 5월 16~26일 동안 분향소와 모금함을 운영했으며 재현극·추모제·화형식 등을 전개했다. 연세대에서는 창작마당극 ‘님을 위한 행진곡’, ‘광주의 넋 위령제’ 등의 행사를 진행했으며 이화여대 학생들은 5월 17일 검은 리본을 착용하고 추모식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했었다.

5·18 추모행사는 기존 5월에 진행된 대학축제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많은 대학에서는 축제 명칭을 ‘대동제’ 등으로 명명하고 5·18 추모행사를 병행한 대학축제를 개최했다. 특히 서울대 학생들은 1984년 기존 5월에 열렸던 축제 명칭을 ‘5월제(祭)’로 변경하고 자체적으로 기금을 모아 행사를 준비하기도 했다. 광주와 5·18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행사를 공식화한 것이다.

1985년 5·18 5주기 전후로 관련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경북대 학생들은 추모제와 진상보고대회를 개최했고 500여명의 학생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가두시위를 시도했다.

또한 경찰들의 저지로 광주에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1980년 오월의 광주’를 향한 순례의 열망을 대학 내에서 재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85년 이화여대 학생들은 5·18행사주간에 탈극·민주영령 장례식 및 부활제 등을 3일간 진행했다. 이 기간에 눈에 띄는 것은 흰 꽃으로 장식된 상여가 법정대앞(광주공용터미널), 가정대앞(금남로), 이화광장앞(전남도청) 등에 마련된 분향소를 차례로 돌았다는 것이다. 이화여대의 주요 공간을 ‘80년 오월의 광주’의 상징적 장소인 광주공용터미널 등으로 설정한 것이다.

같은 기간 건국대 학생들 역시 대학축제 기간에 상여를 만들어 장례행렬로 건국대 곳곳을 돌았다. 또한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있는 공간인 ‘광주로(光州路)’를 만들어 축제 기간 내내 건국대 학생들로 하여금 그날의 진실과 희생자에 대한 추모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까지 진실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진정한 ‘광주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수많은 ‘전국의 5·18들’ 덕분에 ‘지금-여기’의 5·18이 조명될 수 있었다. 즉 1980년 5월, 군사반란세력에 의해 광주시민들은 패배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그 후 마땅히 밝혀지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친 수많은 젊은이들 덕분에 5·18은 승리의 역사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모두의 오월, 하나되는 오월’을 주제로 제44주기 오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올해는 40여년 전 ‘광주의 봄’을 앞당기고자 했던 ‘전국의 5·18들’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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