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세계가 아니다- 김승일 조선대 명예교수
2024년 05월 03일(금) 00:00
이외수의 ‘절대강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꽃꽂이 선생님이 다섯 살 난 어린이에게 동자꽃을 보여주면서 묻는다. “이게 무슨 꽃인지 아니?” 그러자 이 어린이가 반문한다. “그냥 이쁘다는 것만 알면 안 되나요?” 맞다. 그냥 그 꽃의 아름다움에 ‘참 이쁘구나’하면 되는 것을, 선생님은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생각에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야 알든 모르든 그 꽃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면 되는 것이지 꽃 이름을 아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어쩌면 그 꽃이 왜 아름다운지 알려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클래식이 그렇다. 들으며 그냥 ‘아름답구나’ 하면 된다. 그렇게 느끼고 감동하면 충분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다고 불안해하고 클래식은 어렵다 외면해 버린다.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우니까 예술이라 하겠지? 그렇다면 뭔가 예술적 메시지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게 뭐지? 나는 모르겠는걸? 혹시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그러니 나는 클래식 음치인가봐, 아! 어려워하며 마음을 닫아버린다.

하지만 클래식은 원래 태생적 본성이 감응(感應)에서 출발해 감응으로 소통하는, 말하자면 음악가와 감상자 사이에 서로 ‘필(feel)’로 소통하는, 감성에 바탕을 둔 예술이다. 그러니까 “선생님, 꽃 이름 모르고 그냥 아름답구나 하면 안되나요?” 하듯이 감응만으로도 충분한 세계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소통’이고, 예술가의 감정이 감상자에게 ‘전염’ 또는 ‘감염’되는 세계라고 했다. 무엇을 감염시키고 무엇이 어떻게 전염되고 소통되는 것인지 그 ‘무엇’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 무언가를 밝히고 알아내고 규명하는 일은 예술이, 음악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알아내야 하고 밝혀낼 일이 있다면 음악보다는 언어로 소통할 때 더욱 더 정확히 이루어질 일이다. 음악은 그렇게 질문하고 대답하며 밝혀낼 내용이 따로 없다. 그래서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곳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한다.

예술의 소통은 상상력으로 감염되면서 상상으로 도취, 공감하는 공명(共鳴)의 세계이다. 알아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의문을 가져야 하고 명쾌한 대답을 찾아내야 비로소 이르게 되는 세계가 아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상상력으로 전염되고 상상으로 공감하면서 도취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예술의 세계이다. 그러한 상상의 세계는 어차피 추상의 세계이고 상상의 도취이기에 미지(未知)의 경지이기도 하다.

클래식 감상자들 중에는 아름다운 음악에 도취되다가도 가끔씩 전혀 필이 오지 않는 대목을 만날 때, 이게 뭐지? 왜 이렇게 알 수 없는 대목이 나오지? 내가 무식해서 못 알아 듣는걸까? 그래서 클래식이 어렵다는 걸까? 하며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건 아는 게 없어서, 어려워서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예쁘고 아름다운 선율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얼른 ‘필’이 오지 않는 구절도 당연히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단지 낯설어 쉽게 감염되지 못하고 익숙해지지 않아 쉽게 ‘필’이 오지 않았을 뿐이다.

아름다운 꽃도 그 꽃나무 전체가 아름다운 꽃송이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듯이 클래식의 모든 순간순간이 다 아름답구나 하는, 쉽게 감동으로 감염되는 예쁜 음악만일 수는 없다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음악에도 주연이 있고 조연도 있고 엑스트라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서서히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클래식은 질문하고 대답하는 세계가 아니다. 상상하고, 상상으로 소통하고, 상상으로 전염되고, 상상으로 공감하는 추상의 세계이다. 그래서 클래식의 세계는 알아낼 일도 없으니 모를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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