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봄이 전하는 말-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4월 13일(토) 22:00 가가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동네입니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도시이면서 동시에 시골의 정취가 풍기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입니다. 동네로 들어오다 보면 이곳 무등산의 이마가 훤히 보이지요. 원만하고 덕스럽고 넉넉하고 편안한 모습입니다. ‘무등’이라는 이름답게 어떤 차별도 없는 절대 평등을 지향하는 산.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기쁜 사람 슬픈 사람, 아픈 사람 안 아픈 사람 모두 다 보듬어 줄 것 같은 품 넓은 산입니다. 그 아래 깃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이렇게 가까이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흔히 삶은 잠깐의 소풍이며 우리는 곧 돌아가야 할 처지라고 합니다만, 그건 잠시 잊어두고 여기 오래오래 머물러 있어도 좋겠습니다. 상처받고 쓰라린 마음도, 고달프고 서러운 기억도 여기 이 산자락에 기대어 있으면 왠지 모르게 거뜬해질 것 같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과묵한 스승처럼 묵묵할 따름이지만, 그로 하여 오히려 더 깊은 깨우침을 얻게 하곤 하니까요.
눈앞에 봄이 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봄을 봅니다. 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가버리는 야속한 계절이지만, 지금은 휘날리는 벚꽃과 쑥쑥 내민 새싹들의 향연으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봄은 확실히 뭔가를 ‘보여주는’ 계절이 맞는 것 같습니다. 봄은 두 뺨과 두 귀와 두 볼로도 오지만, 역시 두 눈으로 올 때가 진짜 봄인 듯싶어요. 별사탕을 뿌려놓은 듯 또록또록한 봄까치꽃이나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어린싹이 화들짝 눈앞에 다가설 때,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봄을 본 것이죠.
엉성하던 산이 나날이 빼곡해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푸른 솔만 보이더니 여기저기 산벚꽃이 환히 피고, 굴참나무, 느티나무, 벽오동, 싸리, 찔레 들도 손 흔들어 출석을 알립니다. 저마다 ‘저요, 저요’ 제 존재를 밝히느라 약간의 소란은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조용할 수도 없겠군요.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산은 아무 소리가 없습니다.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고요 속에 펼쳐지는 눈에 띄는 변화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산은 온갖 생명을 품고 있으면서도 전혀 요란하지 않습니다. 모든 색채를 다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현란하지 않습니다. 산은 고요한 가운데 쉼 없이 움직이며, 움직이는 가운데도 고요를 잃지 있습니다. 고요와 움직임이 환상의 하모니를 이룬 듯 다정하고 조화롭고 심지어 신령스럽기까지 합니다. 얼마든지 믿고 기대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길을 걷습니다. 벚꽃 휘날리고 쪼르릉 다람쥐가 달려가고 나무 아래 여인들 몇이 소풍을 즐기고 있네요. 넓게 편 자리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 채 봄날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나온 듯 옆에는 커피도 있고 빵 봉지도 보입니다. 도란거리는 말소리와 정겨운 웃음소리와 흩날리는 벚꽃잎이 맑게 쌓여가고 있습니다. 향긋하고 나긋나긋한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문득 이 모든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마다 익숙하게 봐온 풍경인데 왜 불쑥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요? 오늘따라 왜 유독 새로워 보일까요? 새싹은 왜 돋고 꽃은 왜 또 이리 예쁘게도 피었을까요? 혹시 못다 한 말이라도 있는 걸까요? 꼭 다시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도?
곰곰 봄의 전언을, 꽃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요?
그대여,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라. 일어나 움직여라. 너는 본디 움직이는(동) 존재(물)가 아니더냐. 몸도 움직이고 생각도 움직여라. 길 위에서 길을 만나라. 절망도 냉소도 다 버리고 오직 너의 보폭에 집중하라. 꽃 피는 아침과 꽃 지는 저녁을 기억하라. 기쁨도 슬픔도 네 안에 있는 것, 너는 ‘지금 여기’를 노래하라.
봄은 최선을 다하여 말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다시 낯섦과 설렘과 충격을 주어서 마음마저 새롭게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봄은 그러려고 다시 왔나 봅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삼백예순다섯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나 봅니다. 어디 멀리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날을 기다려 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밝고 환한 꽃으로 피어서, 연초록 새싹으로 돋아서 간 데마다 족족 눈부신 광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싸하고 따끔하게 말입니다.
산은 온갖 생명을 품고 있으면서도 전혀 요란하지 않습니다. 모든 색채를 다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코 현란하지 않습니다. 산은 고요한 가운데 쉼 없이 움직이며, 움직이는 가운데도 고요를 잃지 있습니다. 고요와 움직임이 환상의 하모니를 이룬 듯 다정하고 조화롭고 심지어 신령스럽기까지 합니다. 얼마든지 믿고 기대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길을 걷습니다. 벚꽃 휘날리고 쪼르릉 다람쥐가 달려가고 나무 아래 여인들 몇이 소풍을 즐기고 있네요. 넓게 편 자리에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 채 봄날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나온 듯 옆에는 커피도 있고 빵 봉지도 보입니다. 도란거리는 말소리와 정겨운 웃음소리와 흩날리는 벚꽃잎이 맑게 쌓여가고 있습니다. 향긋하고 나긋나긋한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문득 이 모든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마다 익숙하게 봐온 풍경인데 왜 불쑥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요? 오늘따라 왜 유독 새로워 보일까요? 새싹은 왜 돋고 꽃은 왜 또 이리 예쁘게도 피었을까요? 혹시 못다 한 말이라도 있는 걸까요? 꼭 다시 들려주고 싶은 말이라도?
곰곰 봄의 전언을, 꽃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요?
그대여,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라. 일어나 움직여라. 너는 본디 움직이는(동) 존재(물)가 아니더냐. 몸도 움직이고 생각도 움직여라. 길 위에서 길을 만나라. 절망도 냉소도 다 버리고 오직 너의 보폭에 집중하라. 꽃 피는 아침과 꽃 지는 저녁을 기억하라. 기쁨도 슬픔도 네 안에 있는 것, 너는 ‘지금 여기’를 노래하라.
봄은 최선을 다하여 말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다시 낯섦과 설렘과 충격을 주어서 마음마저 새롭게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봄은 그러려고 다시 왔나 봅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삼백예순다섯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나 봅니다. 어디 멀리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날을 기다려 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밝고 환한 꽃으로 피어서, 연초록 새싹으로 돋아서 간 데마다 족족 눈부신 광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알싸하고 따끔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