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헌법 전문과 유네스코에 등재된 4·19혁명 - 이병열 4·19민주혁명기념사업회장
2024년 04월 08일(월) 00:00 가가
올해는 4·19 혁명 64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광주시는 관례를 깨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현장에서 4·19 혁명 기념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처음 민주화 초석을 이룬 역사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이 헌법 전문에 등재돼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4·19 혁명은 32년간 군사정권 통치로 잊혀져 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면서 빛을 보게됐고 2023년 5월 24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4·19 혁명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국 대도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돼 피흘리며 싸운 사건이다. 186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을 탄생시킨 위대한 민주혁명으로 우리 민족의 민주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현재 안타까운 것은 국민 대다수가 4·19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현 시대의 거울인 4·19 역사를 정치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사실은 더욱 안타깝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3·1운동 정신과 4·19 민주이념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모든 폐습과 불의를 타파해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의 안전, 자유,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독립한 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12년간 통치하며 부정부패와 독재정치를 일삼은 게 4·19 혁명의 원인이 됐다. 직접적 원인은 1960년 3월 15일 영구집권을 위한 부정선거다. 당시 자유당은 3인조, 5인조, 투표함 바꾸기 등을 통해 국민주권을 박탈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3·15 부정선거 반대 규탄은 선거무효 선언 후인 12시 40분께 광주 민주당원들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상여를 맨 채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곡(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를 한 데서 시작됐다. 1000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함께 전남도청을 향해 진행하던 중 금남로에서 경찰과 충돌, 이필호 의원 등 다수가 붙잡혀 갔고 조계현씨가 총대에 맞아 쓰러졌다
3시간 후 마산에서도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3시 40분과 오후 7시에 두 차례 일어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행방불명됐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됐다. 이 사진이 전국에 보도되자 경찰의 잔혹성에 전 국민은 분노했다.
의병과 학생독립운동정신인 불의에 항거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광주는 1960년 4월 18일 광주고 학생 하숙방에서 광고생 11명과 조대부고생 1명이 모의를 했다. 4월 19일 10시30분께 광고생들은 봉쇄하고 있는 경찰과 선생님을 뿌리치고 교문을 박차고 나가 광주 4·19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시내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상고 등 각 고등학교로 달려가 부정선거 무효와 부패한 독재정권 타도 데모에 동참할 것을 간절히 호소, 오후 2시께 구도청앞 광장과 금남로에 광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맨주먹으로 몸을 던져 참여한 학생과 경찰이 충돌했고 학생 투석전,육탄전에 이어 경찰들은 최루탄, 물대포, 공포탄 등으로 대적했다. 밀고 밀리기를 반복한 끝에 밤 9시 20분께 광주경찰서 앞에 운집한 데모대에 경찰 돌격대가 실탄을 발사, 7명의 사망자와 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는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민주성지 광주는 4·19 영웅들 상징물인 4·19 민주혁명기념탑을 세웠다. 기념탑에는 당시 참여했던 15개 학교가 아닌, 17개 학교가 기록돼 있는데 2개 학교는 4·19이후 개교한 학교로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 4·19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또 4·19기념탑 건립 당시부터 4·19 관계자들은 추모 재단과 거리가 있는 곳에 기념탑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광주시는 지역 최초의 민주화 역사인 4·19를 소외시키고 있다.
광주시는 민주화 도시답게 민주성지 광주를 위해 4·19 영웅들을 위해, 소외된 4·19 역사를 위해, 4·19 민주혁명기념탑을 바로 세워야한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처음 민주화 초석을 이룬 역사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이 헌법 전문에 등재돼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4·19 혁명은 32년간 군사정권 통치로 잊혀져 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면서 빛을 보게됐고 2023년 5월 24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3·1운동 정신과 4·19 민주이념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모든 폐습과 불의를 타파해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의 안전, 자유,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3시간 후 마산에서도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3시 40분과 오후 7시에 두 차례 일어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행방불명됐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됐다. 이 사진이 전국에 보도되자 경찰의 잔혹성에 전 국민은 분노했다.
의병과 학생독립운동정신인 불의에 항거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광주는 1960년 4월 18일 광주고 학생 하숙방에서 광고생 11명과 조대부고생 1명이 모의를 했다. 4월 19일 10시30분께 광고생들은 봉쇄하고 있는 경찰과 선생님을 뿌리치고 교문을 박차고 나가 광주 4·19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시내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상고 등 각 고등학교로 달려가 부정선거 무효와 부패한 독재정권 타도 데모에 동참할 것을 간절히 호소, 오후 2시께 구도청앞 광장과 금남로에 광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맨주먹으로 몸을 던져 참여한 학생과 경찰이 충돌했고 학생 투석전,육탄전에 이어 경찰들은 최루탄, 물대포, 공포탄 등으로 대적했다. 밀고 밀리기를 반복한 끝에 밤 9시 20분께 광주경찰서 앞에 운집한 데모대에 경찰 돌격대가 실탄을 발사, 7명의 사망자와 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는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민주성지 광주는 4·19 영웅들 상징물인 4·19 민주혁명기념탑을 세웠다. 기념탑에는 당시 참여했던 15개 학교가 아닌, 17개 학교가 기록돼 있는데 2개 학교는 4·19이후 개교한 학교로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 4·19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또 4·19기념탑 건립 당시부터 4·19 관계자들은 추모 재단과 거리가 있는 곳에 기념탑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광주시는 지역 최초의 민주화 역사인 4·19를 소외시키고 있다.
광주시는 민주화 도시답게 민주성지 광주를 위해 4·19 영웅들을 위해, 소외된 4·19 역사를 위해, 4·19 민주혁명기념탑을 바로 세워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