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신(神)과 인간, 존재의 시간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3월 24일(일) 22:00 가가
맞춰둔 시간을 따라 벨이 울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털고 일어난다. 갈 곳이 없다는 퇴직한 친구들 넋두리를 위안 삼아 출근길을 나선다. 조금 후 시간이면 도로는 차들로 꽉 찰 것이다.
그리 보면 사람들은 시간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기계 같다. 자기 의지대로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조종하는 대로 일어나고, 아침을 먹고, 출근하며, 퇴근한다. 버스나 전철, 심지어 배달 음식이나 커피를 기다리는 일조차 그 기준은 시간이다. 약속도 정하고 나면, 이후 그 시간이 나를 지배한다. 대부분 하루를 시간에 따라 할 일을 생각하고 움직인다.
시간은 신처럼 지엄하게 명한다. 기상하라. 영화가 시작되었다. 서둘러라. 빨리 잠을 자거라. 8살이다, 학교 가라. 서른이다, 취업해라. 50분은 일해라. 그리고 심지어 10분간 쉬라고 휴식 시간까지 관여한다. 그리고 시계는 끊임없이 지켜보며 확인한다.
이강백 작가의 ‘결혼’의 핵심어는 ‘시간’이다. 덤이라는 여자가 여느 여자들처럼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가난뱅이 주인공은 많은 물건을 빌려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그 물건들은 일정 시간이 되면 되돌려줘야 하는 빌린 것들이다. 남자는 물건들이 되돌려지기 전에 결혼 승낙을 받아내야 한다. 주인공은 여인에게 결혼의 가장 소중한 의미가 소유가 아닌 사랑임을, 물건이 되돌려지는 ‘시간’ 과정에서, 설득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시간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사랑의 소중함을 통찰한 작품이다.
우린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물 쓰듯 쓰지만, 시간을 사기 위해 돈을 쓰지 않는다. 돈을 신줏단지처럼 떠받치고 살지만 그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존재라는 것, 역시 모르는 바보 또한 아니다.
주체적으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무언가 쫓기며 산다. 돌아보면 시간이고 그래서 시간에 쫓겨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쉰다. 어쩌면 그 들숨과 날숨 사이의 짧은 호흡이 우리 인생 같다. 그 찰나의 숨이 목숨이고 쉼이 휴식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이나마 연장해보려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결국은 시간의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신(神)이라는 절대자를 만들거나 아니면 그 시간을 축약하고 또 줄이다 신이라는 파생어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법이 없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면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누구나 생의 가을이 되면 빨리 흘러가는 시간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실감하고 숙연해진다. 우린 지금 시간이라는 초고속 열차를 타고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 찰나를 사는 인생은 연극이면서 시간 예술이다. 그 시간이 멈춘 순간이 장례식 날이다.
신과 인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시간이다. 영원 불사의 신과 달리 우린 찰나의 존재이다. 다만 우린 제한된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시간을 지배할 것인지 그리스 신화는 그 답을 들려준다.
시간을 관할하는 두 신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다.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와 달리 카이로스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 심리적이고 가치 있는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삶을 살라는 의미다. 다만 카이로스는 앞 머리카락은 기나 뒷머리는 없다. 크로노스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간직하려면 그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꼭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나가 버리면 뒷머리는 붙들 수 없다. 곧 기회를 잘 활용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살아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존재는 시간의 길이보다 의미가 중요하다. 뜻 있는 시간을 산다면 우린 잘 사는 셈이다. 시간이 사지로 밀어붙인다면 나는 더 물러서지 않고 녀석 앞머리를 꽉 붙들 참이다. 그리고 꼭 내가 너의 하인이 아닌 주인임을 천명하고, 남은 시간 의미 있게, 녀석 주인이 되어 살아갈 참이다.
그리 보면 사람들은 시간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기계 같다. 자기 의지대로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조종하는 대로 일어나고, 아침을 먹고, 출근하며, 퇴근한다. 버스나 전철, 심지어 배달 음식이나 커피를 기다리는 일조차 그 기준은 시간이다. 약속도 정하고 나면, 이후 그 시간이 나를 지배한다. 대부분 하루를 시간에 따라 할 일을 생각하고 움직인다.
주체적으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무언가 쫓기며 산다. 돌아보면 시간이고 그래서 시간에 쫓겨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쉰다. 어쩌면 그 들숨과 날숨 사이의 짧은 호흡이 우리 인생 같다. 그 찰나의 숨이 목숨이고 쉼이 휴식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이나마 연장해보려고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결국은 시간의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신(神)이라는 절대자를 만들거나 아니면 그 시간을 축약하고 또 줄이다 신이라는 파생어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법이 없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면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고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누구나 생의 가을이 되면 빨리 흘러가는 시간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실감하고 숙연해진다. 우린 지금 시간이라는 초고속 열차를 타고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 찰나를 사는 인생은 연극이면서 시간 예술이다. 그 시간이 멈춘 순간이 장례식 날이다.
신과 인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시간이다. 영원 불사의 신과 달리 우린 찰나의 존재이다. 다만 우린 제한된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시간을 지배할 것인지 그리스 신화는 그 답을 들려준다.
시간을 관할하는 두 신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다.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와 달리 카이로스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 심리적이고 가치 있는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삶을 살라는 의미다. 다만 카이로스는 앞 머리카락은 기나 뒷머리는 없다. 크로노스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간직하려면 그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꼭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지나가 버리면 뒷머리는 붙들 수 없다. 곧 기회를 잘 활용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살아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존재는 시간의 길이보다 의미가 중요하다. 뜻 있는 시간을 산다면 우린 잘 사는 셈이다. 시간이 사지로 밀어붙인다면 나는 더 물러서지 않고 녀석 앞머리를 꽉 붙들 참이다. 그리고 꼭 내가 너의 하인이 아닌 주인임을 천명하고, 남은 시간 의미 있게, 녀석 주인이 되어 살아갈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