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견딤과 인생 - 박용수 수필가
2024년 03월 11일(월) 00:00
눈 속 매화가 곱다. 봄의 화신 매화는 매운바람을 견디고 있다.

서두르다 보면 패착을 둔다. 바둑은 지긋해야 한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견디라는 말이다. 잘 견뎌 내야 한다. 상처도 오랜 시간 견뎌내야 낫고, 실상 사랑도 잘 견뎌낸 이가 성취한다.

무등산 하산 도중에 미끄러졌다. 통증을 견디며 절뚝절뚝 내려왔다. 봉황대에 기대어 쉬면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생각했다. 빨치산들의 혹한, 추위와 곡기를 견뎌내는 일 또한 이념과 무관하게 한 인간으로서 결코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빅터 프랭클은 의미 없이 번호로만 취급받는 가혹한 기아와 노동은 물론 배변을 나누는 끔찍한 상황을 견디며 비좁은 수용소에서 대작을 썼다. 신영복 교수 역시,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징역을 살았다. 당시 동료의 체온이 있어서 추운 겨울, 수감 생활이 견딜 만했단다. 그러나 여름에는 그 체온이 오히려 찜통이 되어 동료들에게 적대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견디는 일이 꼭 위대한 신념이나 철학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주 작은 생리적인 것들도 견뎌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급하게 화장실에 갔는데 칸칸이 사람이 들어있을 때, 견딤은 견딤조차 순전히 고통이고 괴로움이 된다.

“삶은 그렇게 그냥 견디는 것이다.”

다소 식상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러 번 곱씹어 본다. 지극히도 평범한 성찰 같지만 씹을수록 맛깔난 통찰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잘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잘 견딘 사람들이다. 아니 잘 견딘 사람이 잘 사는 사람들이다.

내 앞에 놓인 책 한 권, 삶은 그냥 견디는 것이다. 제목만 보고 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이었다. 50대 후반의 박사 학위를 받은 작가가 내린 결론 ‘견딤’ 그도 생이 온통 견딤이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내 삶도 우리 역사도 온통 견딤 아니었을까. 진학하기 위해 견뎠고, 야간 학습, 대학입시, 취업, 전역, 퇴직까지 어느 한순간도 견디지 않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수많은 외침도 견뎠고, 흉년과 역병도 견뎌냈다.

주사약이 들어갈 때 통증을 견디고, 퇴원할 때까지 고충도 견딘다. 싹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꽃 필 때까지 지켜보며, 익을 때까지 버틴다. 비와 벼락을 맞고, 햇살과 가뭄을 이겨내야만 열매를 맺는다.

식욕도 견디고, 그리움도 누르며,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산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단식, 곧 목숨을 걸고 굶주리는데, 그마저도 조롱당할 때, 그조차 우린 견디고 또 견딘다.

즐거울 때는 순간, 우리 몸 대부분이 수분이듯 우리 삶 대부분은 고통이나 슬픔이다. 그러니 삶은 견뎌내는 일이다. 좋아하는 고기도 낚는 즐거움보다 기다리는 견딤의 시간이 백배 천배 더 많고, 내가 지지하는 팀이나 정당이 지는 경우가 많아서 승리까지 오래도록 견뎌야 하는 시간이 부지기수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 인생은 원래 견딤이라는 인생 팔고(八苦)가 무겁고 또 무겁다.

반면 고통을 꼭 나쁘지 않다고 평가한 이도 있다. 17세기 의사 토마스 시든햄(Thomas sydenham)은 극한 상황에서 자연이 사용하는 현명한 도구가 어느 정도 염증과 고통이라며 어느 정도 고통이 우리 건강에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신과 의사 안나 렘케(Anna Lembke)는 소소한 불편도 참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통 기피증이 역설적으로 더 많은 고통을 느끼게 한다고 오늘날 세상을 고통 사회(pain society)로 분석한다.

더는 못 참겠다고 이제 더 참고 살지 말자고 하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기보다 오히려 쑥쑥 배가된다.

자객 열전에서 자객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주군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견디고 기다린다. 의로운 복수 이면에는 오랜 견딤이 자리하고 있다. 춘향은 사랑을 위해 고문을 견디고, 충신은 나라를 위해 고통을 견딘다. 고전의 기본 모티프다. 물론 학생들이 합격까지, 어부들이 만선까지, 산모가 출산까지 그 모든 견딤의 중량을 비교할 수 없지만,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적 고양을 할 수 있다면, 눈 속의 매화처럼 고고하게, 삼보 일배의 결연한 자세로 오늘도 나는 견뎌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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