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경제, 그레이트 리셋하라 - 박상하 나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4년 02월 28일(수) 00:00
우리는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을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보다 75년이나 앞선 펜윅위버조합이 공식 기록에 등장한다.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는 지역 상인이나 자본가들의 폭리에 맞서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시작은 초라했지만 로버트 오언같은 선구자적 실험이 기폭제가 되어 협동조합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자본주의의 횡포에 맞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오늘날 사회적경제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협동조합은 많은 나라들이 국가의 정책으로 제도화했고 우리도 기본법을 제정하여 국정과제로 삼았다. 2023년 UN 총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연대경제 활성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는 2022년 채택된 OECD의 ‘사회연대경제 및 사회혁신 권고안’, ILO의 ‘양질의 일자리와 사회연대경제 결의안’과 맥을 같이한다. 이처럼 국제사회는 사회적경제를 지속가능발전 목표 달성과 사회정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권이 바뀌면서 국제사회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형국이다. 새해 들어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했던 청년들이 실업자 신세가 되고 중간 지원기관들이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런 결과에 대한 형식적 책임은 정부 정책 변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용적 책임은 들여다 볼 것이 많다. 세상을 관찰하고 비판하는 일이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듯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경제가 좌파나 진보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작할 때부터 사회적경제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전유물이라는 논란에 시달려왔다. 색깔론과 정치적인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공과를 추려서 잘못한 것은 버리고 옥석을 가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내용적인 책임을 따져보려면 지난날의 성과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경제에서 한국의 역할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2014년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GSEF)는 서울시 주도로 설립하여 7년 간 의장 도시를 맡아 2년마다 국제 포럼을 진행하는 국제적인 기구가 되었다. 또한 2021년에는 제33차 세계협동조합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일자리 창출과 취약계층의 삶의 질 개선이랄지 지역공동체 회복과 사회혁신에 눈을 뜨게 해 준 풀뿌리 경제활동의 구심점에 불을 지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잘못되었거나 부족했던 점은 무엇일까. 바로 정부 주도에 의한 육성 정책이다. 가장 뼈아픈 반성문을 써야 할 지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행정과 사회적경제 당사자 그리고 시민사회 모두가 공범일 수 있다. 지역중심이 아니라 성과에 집착했던 행정당국은 양적 숫자에만 집중했고 당사자들은 보조금에 무임승차한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시민사회는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여 개입할 여지가 없다보니 우리의 사회적경제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벌거벗겨졌다. 우리 광주는 민주 인권 평화의 도시로 사회적경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라고 확신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주도 육성정책의 희생양에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초창기 협동조합의 양적 비중이 전국에서도 가장 높았던 것은 자랑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족쇄가 되어 휴면상태로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에서 시도했던 협동조합의 규모화와 투자유치를 위해 출자증권의 상장이나 거래 활성화, 비조합원에 대한 과도한 자본조달 등은 모두 주식회사의 경영방식을 모방하다 무너졌다. 투자 유치와 규모화에 골몰한 나머지 무늬만 협동조합이지 주식회사와 다를 게 없었다. 주식회사는 주주와 투자가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는 이용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결국 사회적경제는 일반기업과 차별화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으며 협동조합의 위기는 정체성을 망각할 때마다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줬다. 레이들로 박사가 강조했던 위기 중에서도 사상의 위기는 우리에게 던지는 엄중한 경고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협동조합이 태동했을 때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정신으로 말이다. 그레이트 리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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