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마주하기, ‘나’와 마주한다는 것 - 문희영 예술공간 집 대표
2024년 02월 13일(화) 00:00 가가
작품과 대면하는 시간, 너른 공간을 가로지르는 신발 소리와 미디어 기기들에서 나오는 기계 소리, 대화하는 관람객들의 작은 목소리 말고는 다른 방해가 없다. 고요함이 몸과 마음을 안온하게 하는 시간과 공간. 전시를 보는 건 마음 가득 안온한 충만함을 채우는 일이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마치 다른 평행세계에 몸을 옮겨 놓은 듯한 색다른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작품과 만나고, 작가의 영혼과 마주하는 시간. 어떤 작품은 과거를 상기시키고 또 어떤 작품은 끝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작가가 몰입한 시간, 붓이 스쳐 간 흔적들을 따라 작품이 펼쳐 내는 저 먼 영혼의 평행세계로 한참을 들어간다.
필자는 관련 분야의 일을 하며 일로 작품을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이지만 때론 고요하게 작품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굳이 작가의 이름을, 작품의 명제를, 전시의 의도를, 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천천히 아주 긴 시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작품이 말을 걸어 온다. 작품과 은근한 대화를 한다. 미술관은 그런 공간이다. 미술관에 간다는 것, 미술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몇 년 사이 팬데믹의 시기를 지나며 미술관, 박물관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광주만 하더라도 국공립미술관이나 갤러리들에도 발걸음이 북적인다. 인스타그램 인증샷의 성지가 되기도 하고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전시를 본다는 게 특정한 사람들의 취미가 아닌 많은 이들에게 작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오픈런’이 갤러리에서도 생겨났고, 핫한 전시의 인증샷은 SNS의 의례 절차와도 같아졌다.
전공을 하고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인지라 이러한 상황들이 반갑기 그지없으면서도 이들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일지, 사람들은 전시를 보며 어떤 것들을 가져가는지 의문도 들었다.
작품을 마주하는 것은 예술을 몸과 마음에 들이는 일이다. 영국의 라파엘전파 화가 존 에버릿 밀레이의 ‘눈 먼 소녀(The blind girl)’(1956) 작품을 보며 그 의미를 되짚어 본다. 앞을 보는 동생이 무지개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언니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림 속 찰나의 순간, 보이지 않지만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언니의 모습. 예술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그림이다.
예술은 우리가 당장 눈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스멀스멀 들이민다. 보이지 않고, 경험하지 못하고, 알고 있지 않는 숱한 장면들을 눈앞에 선사한다. 천천히 작가가 함축한 시간으로 걸어가 보는 경험, 그 세밀한 감각과 감정의 행간을 파고드는 일이다. 이는 결국 ‘나’를 만나는 일이다. 수많은 ‘나’들이 쏟아낸 열매들 사이 나의 열매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유기체인 작품들이 들어찬 미술관이라는 공간으로 몸을 옮겨 획득하는 나의 열매이다.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잠이 드는 일상을 떠난 심연의 경험이자 번뇌의 휴식이다. 단지 표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술은 표면의 껍질을 벗겨내야지 비로소 드러나는 내면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내게 익숙한 공간과 반복되는 시간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작품과 마주하는 공간과 시간은 특별하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선 순간 500년 전의 이들은 천국과 지옥의 틈 사이로 들어갔을 것이며, 현재의 우리는 500년 전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파리 튈르리 정원의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들어선 순간 우리는 100년 전 모네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들어간다. 비단 과거의 시공간 뿐일까.
예술은 사회의 특수하고 예민한 지점들을 진중하고도 뭉클하게 품어낸다. 언어도 다르고 얼굴색도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 다르지만 결국 태어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인간의 공통된 내밀한 행색들을 들춰내는 게 예술이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 사이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작품과 마주하며 ‘예술’이란 명제의 근원 지점에 가까이 닿아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변치 않을 ‘삶’이라는 이야기들을 조금은 복잡하게 조금은 다른 언어로 풀어내었지만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기꺼이 알아차릴 수 있기를,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더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필자는 관련 분야의 일을 하며 일로 작품을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이지만 때론 고요하게 작품과 대면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굳이 작가의 이름을, 작품의 명제를, 전시의 의도를, 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천천히 아주 긴 시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작품이 말을 걸어 온다. 작품과 은근한 대화를 한다. 미술관은 그런 공간이다. 미술관에 간다는 것, 미술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마주하는 것은 예술을 몸과 마음에 들이는 일이다. 영국의 라파엘전파 화가 존 에버릿 밀레이의 ‘눈 먼 소녀(The blind girl)’(1956) 작품을 보며 그 의미를 되짚어 본다. 앞을 보는 동생이 무지개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언니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림 속 찰나의 순간, 보이지 않지만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언니의 모습. 예술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그림이다.
예술은 우리가 당장 눈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스멀스멀 들이민다. 보이지 않고, 경험하지 못하고, 알고 있지 않는 숱한 장면들을 눈앞에 선사한다. 천천히 작가가 함축한 시간으로 걸어가 보는 경험, 그 세밀한 감각과 감정의 행간을 파고드는 일이다. 이는 결국 ‘나’를 만나는 일이다. 수많은 ‘나’들이 쏟아낸 열매들 사이 나의 열매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유기체인 작품들이 들어찬 미술관이라는 공간으로 몸을 옮겨 획득하는 나의 열매이다.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잠이 드는 일상을 떠난 심연의 경험이자 번뇌의 휴식이다. 단지 표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술은 표면의 껍질을 벗겨내야지 비로소 드러나는 내면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내게 익숙한 공간과 반복되는 시간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작품과 마주하는 공간과 시간은 특별하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선 순간 500년 전의 이들은 천국과 지옥의 틈 사이로 들어갔을 것이며, 현재의 우리는 500년 전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파리 튈르리 정원의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들어선 순간 우리는 100년 전 모네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들어간다. 비단 과거의 시공간 뿐일까.
예술은 사회의 특수하고 예민한 지점들을 진중하고도 뭉클하게 품어낸다. 언어도 다르고 얼굴색도 다르고, 사는 모양새도 다 다르지만 결국 태어나고 살아가고 사라지는 인간의 공통된 내밀한 행색들을 들춰내는 게 예술이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 사이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작품과 마주하며 ‘예술’이란 명제의 근원 지점에 가까이 닿아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변치 않을 ‘삶’이라는 이야기들을 조금은 복잡하게 조금은 다른 언어로 풀어내었지만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기꺼이 알아차릴 수 있기를,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더 충만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