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리움을 어찌할꼬?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02월 08일(목) 00:00 가가
내일부터 설 연휴다.
괜스레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이때쯤이면 흙먼지 날리며 시골 버스가 포플러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올 것 같고, 저 멀리 기적소리나 뱃고동 소리도 요란할 것 같다.
설 전날이면 우린 신작로 가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멈추면, 서울이고 부산 어디론가 떠났던 형과 누나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한 아름씩 들고 내렸다. 번쩍번쩍한 구두, 멋진 선글라스, 상냥한 서울말, 나도 어서 커서 서울 가서 돈 벌어야겠다며 부러워했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밤새, 서울 자랑을 했다. 우린 신기한 건물, 네온사인, 동물원, 공원에 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으며, 촌놈이라고 깔보아도 아무 말 못 했다.
설은 그렇게 그리운 사람과 함께 왔다. 도회지에 사는 친척들도 왔다. 백부와 숙부도 와서 사랑방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웃음으로 넘쳐났다. 부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는지 집안은 여기저기 음식 잔치보다 온통 말 잔치, 이야기 잔치, 웃음 잔치였다.
그날 밤, 잠을 깨 소변보러 가는 마당에서 나는 들었다. 구두닦이, 공돌이, 감시와 감독 등의 험한 말과 함께 자기도 학교 다니고 싶다고 아버지와 다투던 앞집 형을. 미싱, 시다, 작부, 다방 등의 생소한 말과 함께 절대 올라가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울며 매달리는 이웃집 누나의 하소연을.
눈부신 가난, 이촌향도의 단편, 고샅은 윗집 아랫집 세배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그렇게 울고도 다음 날 아침 씩씩하게 웃으며 서울로 향했다.
그런 골목이 지금, 조용하다 못해 고독하다. 꽉 닫힌 대문, 쓸쓸한 골목, 외로운 마을. 이제 그런 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말이 설이지 박물관에서조차 찾기 어렵게 설은 겨우 명칭으로만 남았다. 그 빈 곳을 여행이나 휴식이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립다. 가난이 이토록 배가 불러서 그리워질 줄 몰랐다. 그 호롱불 아래 어둠이 이토록 빛나게 보고플 줄 몰랐다. 고샅 가득 메웠던 여자아이들의 줄넘기 소리, 개구쟁이들의 까르르 웃던 소리, 그 초라한 설빔 한 벌, 해우 가루 들어간 떡국 한 그릇, 다 닳아버린 팽이, 헤지고 찢어진 딱지 한 장…. 거기엔 정이 있었고, 사람의 입김이 있었으며 그리고 꿈과 청춘이 있었다.
지금처럼 고향을 아무 때나 오가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향 하면 울컥울컥 눈물이 나왔을 테다. 객지에서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가웠을 텐데, 고향 말을 쓰는 사람이면 그 얼마나 반가웠으랴. 묻지도 않고 흉금을 터놓고 살았단다. 타향에서 고향 사람은 형이요 누나이자 곧 자기 자신이었다.
훗날 그들도 각기 결혼했다. 그런데 참 특이 했다. 신랑 신부 고향이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고향이라는 끈이 그들을 위로해주고 단단히 묶어주었던 것이다. 고향은 그랬다. 부모와 가족이었고, 피였으며 신앙이었던 때였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고 따라 울었다. 딱히 보고 싶은 사람도 그리운 이도 없었던 그날이었지만 그들의 눈물을 통해 그리움이란 것을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반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일이 설날이다. 그때 그 이산가족이 만나서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것처럼 누군가를 끌어안고 엉엉 울고 싶다. 그런데 붙잡을 그 누군가가 없다. 운동장은 잡초가 무성하고, 마을은 아기 울음소리 멎은 지 오래다. 명절이라고 이젠 새삼 찾아올 사람도 없고,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섧고 아리다.
지금 어디에서 사는지 모르는 이웃집 순희, 이불을 싸 들고 버스에서 내리던 미숙이, 그 누나를 좋아해서 같이 야반도주한 만포 형님, 그 동생 덕길이. 그리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마을 어르신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설이 그리운 건 사람이 그립고 인정이 그립다는 말이다. 한번 간 그들은 왜 영영 돌아오지 않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대답도 없다. 왜 없는 사람이 더 그립고, 떠난 사람이 더 보고 싶은 건지 알 수도 없고, 명절 탓하기도 그렇다.
이 그리움을 어찌할꼬? 영영 없어지지 않을 이 사무친 잡것을….
괜스레 시선이 창밖으로 향한다. 이때쯤이면 흙먼지 날리며 시골 버스가 포플러 사이를 굽이굽이 돌아올 것 같고, 저 멀리 기적소리나 뱃고동 소리도 요란할 것 같다.
설 전날이면 우린 신작로 가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멈추면, 서울이고 부산 어디론가 떠났던 형과 누나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한 아름씩 들고 내렸다. 번쩍번쩍한 구두, 멋진 선글라스, 상냥한 서울말, 나도 어서 커서 서울 가서 돈 벌어야겠다며 부러워했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밤새, 서울 자랑을 했다. 우린 신기한 건물, 네온사인, 동물원, 공원에 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으며, 촌놈이라고 깔보아도 아무 말 못 했다.
그런 골목이 지금, 조용하다 못해 고독하다. 꽉 닫힌 대문, 쓸쓸한 골목, 외로운 마을. 이제 그런 설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말이 설이지 박물관에서조차 찾기 어렵게 설은 겨우 명칭으로만 남았다. 그 빈 곳을 여행이나 휴식이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립다. 가난이 이토록 배가 불러서 그리워질 줄 몰랐다. 그 호롱불 아래 어둠이 이토록 빛나게 보고플 줄 몰랐다. 고샅 가득 메웠던 여자아이들의 줄넘기 소리, 개구쟁이들의 까르르 웃던 소리, 그 초라한 설빔 한 벌, 해우 가루 들어간 떡국 한 그릇, 다 닳아버린 팽이, 헤지고 찢어진 딱지 한 장…. 거기엔 정이 있었고, 사람의 입김이 있었으며 그리고 꿈과 청춘이 있었다.
지금처럼 고향을 아무 때나 오가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향 하면 울컥울컥 눈물이 나왔을 테다. 객지에서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가웠을 텐데, 고향 말을 쓰는 사람이면 그 얼마나 반가웠으랴. 묻지도 않고 흉금을 터놓고 살았단다. 타향에서 고향 사람은 형이요 누나이자 곧 자기 자신이었다.
훗날 그들도 각기 결혼했다. 그런데 참 특이 했다. 신랑 신부 고향이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고향이라는 끈이 그들을 위로해주고 단단히 묶어주었던 것이다. 고향은 그랬다. 부모와 가족이었고, 피였으며 신앙이었던 때였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고 따라 울었다. 딱히 보고 싶은 사람도 그리운 이도 없었던 그날이었지만 그들의 눈물을 통해 그리움이란 것을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반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일이 설날이다. 그때 그 이산가족이 만나서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것처럼 누군가를 끌어안고 엉엉 울고 싶다. 그런데 붙잡을 그 누군가가 없다. 운동장은 잡초가 무성하고, 마을은 아기 울음소리 멎은 지 오래다. 명절이라고 이젠 새삼 찾아올 사람도 없고,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고, 섧고 아리다.
지금 어디에서 사는지 모르는 이웃집 순희, 이불을 싸 들고 버스에서 내리던 미숙이, 그 누나를 좋아해서 같이 야반도주한 만포 형님, 그 동생 덕길이. 그리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마을 어르신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설이 그리운 건 사람이 그립고 인정이 그립다는 말이다. 한번 간 그들은 왜 영영 돌아오지 않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대답도 없다. 왜 없는 사람이 더 그립고, 떠난 사람이 더 보고 싶은 건지 알 수도 없고, 명절 탓하기도 그렇다.
이 그리움을 어찌할꼬? 영영 없어지지 않을 이 사무친 잡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