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그녀, 세이렌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02월 05일(월) 00:00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세이렌’은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에 새의 몸을 가진 바다의 요정이다. 그들은 암초와 여울목이 많은 지중해의 한 섬에 살았다. 감미롭고 매혹적인 노래로 지나가는 선원들의 마음을 홀려 바다에 뛰어들게 하거나 때로는 잡아먹기도 하는 치명적인 유혹자들이었다. 그들이 유혹에 실패한 경우는 단 두 번밖에 없었다. 한 번은 트로이 목마의 설계자 ‘오디세우스’, 또 한 번은 전설적인 음악가 ‘오르페우스’로 인해서였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 일행은 세이렌의 섬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난제 중의 난제였다. 밀납으로 귀를 막으라는 마녀 키르케의 조언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악전고투를 불사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세이렌의 유혹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를 증명하고도 남았다. 선원들은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아예 귀를 막아버렸고, 오디세우스는 귀를 열어둔 대신 옴짝달싹도 못 하게 돛대에 꽁꽁 몸을 묶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결박한 몸을 풀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 명령도 해놓았다. 드디어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선원들은 필사적으로 노를 저었다. 거의 미칠 지경이 된 오디세우스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밧줄은 더욱 조여들었다. 이를 악문 고투 끝에야 겨우 성공했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달인이었는데 그가 연주를 시작하면 생명이 없는 목석들도 일어나 춤을 추었고, 아무리 난폭한 맹수라도 금세 얌전해지곤 하였다. 왕이 되기 위해 황금 양털을 구하러 떠난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대도 항해 중에 세이렌을 만났다. 그러나 원정대의 일원이었던 오르페우스의 리라 연주로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수많은 선원의 목숨을 앗아간 세이렌이 사라지게 된 데는 이처럼 두 영웅의 지략과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유혹에 실패한 그들은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거나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바위로 변했다. 누구든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원칙인 까닭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영영 사라지고 없을까?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을 점령한 채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때보다 더 집요하게, 도저히 그냥 갈 수 없도록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서, 푸른 바다 흰 돛처럼, 마치 지친 영혼들을 위로라도 해주듯이….

우리는 여행 중이었다. 방콕 시내 한복판 짜오프라야 강변, ‘아이콘시암’이라는 화려한 건축물이 있었다. 소위 명품이라고 일컬어지는 고가의 제품에서부터 길거리 야시장의 물건들까지 두루 갖춘 대규모 복합 쇼핑몰이었다. 특히 지하 1층은 재래시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 굳이 멀리 떨어진 야시장까지 갈 필요를 없게 했다. 쾌적한 실내 공간에서 한껏 시장 기분을 느껴버린 우리는, 다음 여정인 재래시장 구경은 생략하기로 했다. 여행의 재미는 누가 뭐래도 쇼핑을 빼놓을 수 없거니와 거대 자본의 탐욕은 진작에 그마저도 간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실컷 눈요기나 하리라는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꾸역꾸역 쓸어 담은 물건들이 양손에 졸랑졸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오기 전부터 미리 계획해둔 것이 있었는데, 맞다, 바로 그거였다.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방콕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이번 여행을 총괄한 큰애가 그건 꼭 해봐야 한다고 사전에 일러둔 바였다. 물론 당연히 환영했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조망하는 맛이 좀 좋은가 말이다. 세이렌을 앞세운 스타벅스의 전략이 더욱 돋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넓고 큰 매장 둥근 기둥 위에서 세이렌, 그녀가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왈칵 반가움이 앞섰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물결처럼 긴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풀빛처럼 청아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어여쁜 얼굴이었다.

우리는 제각기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짜오프라야 강을 바라보았다. 세이렌은 어느새 우리의 입맛까지도 훔쳐내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강에는 배들이 떠가고, 사람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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