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클래식, 네가 그렇다 - 김승일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2024년 01월 30일(화) 00:00
언젠가부터 눈만 감으면 희미한 옛 사진 하나가 떠오른다. 도무지 뭐가 찍혀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거무스레한 오래된 사진이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 흐린 사진에 뭐가 찍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사진은 눈앞에 계속 어른거린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사진에 옛날 전기 없던 시절의 등잔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등잔불의 노란 점 주위로는 무언가 그림자도 보인다. 얼마 전부터는 그 사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서너 살 어린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제일 또렷하게 들렸고, 그 주변에서 깔깔거리는 또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리는듯했다.

그렇게 그 희미했던 옛 사진은 내 기억과 어우려지며 실체를 찾아갔다. 언뜻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미안함보다는 잊고 지낸 세월에 대한 어떤 아쉬움과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처럼 어렵고 막연하기만 했던 클래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클래식도 마치 희미한 옛 사진에서처럼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계속 찾아 나서면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하고, 궁금증을 풀려 간절히 갈망하면 분명 어떤 모습으로든 나에게 다가온다.

간절한 호기심과 상상력, 그리고 찾아 나서는 갈망의 실천은 어렵게만 보이는 클래식의 세계로 접어드는 첫 길목이다.

요즘은 휴대전화를 통해 클릭 한번이면 라흐마니노프나 말러의 음악을 만날 수 있다. 이 음악은 마치 초점이 잘 맞춰진 선명한 사진처럼 우리 귓속을 파고 든다. 언제 어디서나, 간절함 없이도 너무나 쉽게 클릭 한번으로 음악을 만날 수 있는 편리함은 오히려 호기심을 지워버렸다.

그러니 오래된 사진을 접할 때 같은 궁금함도, 간절함도 당연히 필요 없어졌고, 간절함이 없으니 찾아 나서지도 않는다. 초점이 안 맞은, 희미한 옛 사진에서처럼 뭔가 아쉬움으로 두고 두고 마음에 남아 있다 어슴프레 기억에서 떠올리며 새삼스레 위로받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CD로 음악을 듣던 시절, 누군가는 LP를 닦아 턴테이블에 올리고 스위치를 눌러 회전판이 속도를 내면 떨리는 손으로 바늘을 올려놓은 채 가슴 졸이며 음악을 기다리던 그 맛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휴대전화에서는 더욱 더 그런 맛을 기대하기 어렵다. 휴대전화에서 음악은 울려도 음악을 향한 각자의 열망과 갈망까지 포용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두 세 달 전에,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로얄석을 예매해 두고 연주회날을 기다리는 그 맛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좋은 옷 차려입고 좌석에 앉아 공연 시작 전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 특별한 공간이 주는 적막감을 느껴본다. 좌석이 다 차고 드디어 조명이 바뀌면서 온 시선이 무대에 집중 될 때, 연주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인사하는 몸짓은 또 얼마나 멋스러운지 모른다. 포디엄에 오른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자 관악 연주자들은 악기를 치켜들고 현악 주자들은 활을 일제히 높이 올린 채 정점에서 정지한다. 그 찰나의 순간은 초점이 잘 맞춰진 사진이나 휴대전화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설렘을 선사한다.

이렇게 드넓은 공간에서 꼼짝없이 함께 견디며 박수치고, 앙코르를 외치며 클래식을 날것으로 만나는 이 시간은 클래식 초심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입문 코스 중 하나다. 연주회가 끝나고 천천히 공연장을 나와 걷다 만나는 마음 속 잔상들은 초점 흐린 오래된 사진에서 느꼈던 간절함, 애절함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유명한 시를 따라 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클래식이 그렇다”

클래식은 살아 있는 날것으로 즐겨야 더욱 예쁘고 더욱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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