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業報)를 전환하라 - 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2024년 01월 26일(금) 00:00 가가
영혼 속에는 업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 그것을 아뢰야식 또는 함장식(咸藏識)이라고 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블랙박스와 같은 기능을 가진 함장식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저장해 놓은 식은 예민하고 복잡해서 어떻게 업장을 받아서 저장하는지 또 그 업장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식별해서 받아들이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마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해 놓은 성격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다르고 얼굴 모습이 다른 것은 전부 내가 무엇을 저장했는가에 따라 그렇다.
그런데 이 업 주머니는 우리가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무엇이든 다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땅이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듯 전부 받아들이니까 저장식이고 한번 들어가면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 이제 그 없이 나올 때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나오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빼낼 수 없어서 ‘사수(捨受)’라고 말한다. 그리고 집어 놓으면 반드시 싹이 터서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저장식이다. 분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저장하는데 어떤 종자가 들어가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이숙식(異熟識)이다.
한번 들어간 종자는 때가 되면 점점 밖으로 나오는데 이 종자가 기존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금생은 사람인데 다음에는 다른 류(類)로 태어날 수도 있어서 이숙식이라고 한다. 이숙식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장소를 옮기고 때를 달리해서 변하고 또 종류를 달리해서 변한다. 우리가 종자를 뿌려 놓으면 그 종자이긴 한데 처음 모습에서 부풀려져 점점 다른 모습으로 성장을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숙이 되는데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싶은데 어디가 아파서 못하게 만들거나 무슨 장애물이 생겨서 못 하게 하는 것은 자기가 지어놓은 업보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생에 이 업을 어떻게 녹여내야 하는지가 큰 과제이다. 업은 크게 세 가지로 주머니에 들어간다.
첫째는 감각한 것이 들어간다. 느꼈다고 의식을 해도 들어가고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들어가고 내가 그것을 전혀 감각하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간다. 이것이 촉(觸)인데, 내 몸이 지금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의식하지 의자에 앉았다는 감각을 해서 들어가듯이 나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 감각한 것들은 전부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생을 살면서 좋은 환경이나 도가의 환경에 살면 그런 것이 내 감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둘째는 생각한 것이 들어간다. 이것이 상사(想思)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상(想)이고 더 깊이 고민하고 생각한 것은 사(思)이다. 우리가 아무개가 그립고 아무개가 밉다는 생각만 해도 그것이 다 들어간다. 누군가가 나를 멀리서 미워한다면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해도 영혼은 그것을 감지해서 저장한다. 자기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기 영혼 속에 안테나를 달아놓고 신기하게 뭐든 감각해서 저장하니까 남이 안 보는 곳에서 욕을 해도 전부 집수(執囚)하는 것이다. 우리의 업은 마치 작은 냇물이 큰 강물로 흘러가듯이 전생에 지어놓은 것은 나도 모르게 폭포수같이 업력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계속 들어가고 나가는 작용을 반복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지저분하고 못된 감각과 생각과 행동은 빠져나오고 금생의 성스러운 생각과 성스러운 작용은 많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좋은 업을 다시 저장하고 나쁜 업을 환류(還流)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나올 때는 전생에 저 사람과 원수였다면 금생에 그 사람을 보면 의식이 ‘저사람 고약한 사람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작용한다. 그래서 행동을 말로 하거나 무엇을 할 때 돌리자는 말씀이 참 좋은 마음 공부이다. 원망을 감사로 돌리고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고 이렇게 업보를 좋게 변형시켜서 저장하는 것이 업보 전환이다.
무슨 일이든지 감수불보(甘受不報)하라는 말이 있다. 달게 받는 것이 업을 소멸하는 길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달게 받지 못하고 ‘부모님은 왜 나를 이렇게 낳아줬어, 왜 세상은 나만 고통스럽게 하는 거야’하고 원망한다. 그러니 업은 업대로 받으면서 원망을 하다보면 원망의 업도 쌓이고 새로운 업도 짓게 된다. 스스로 괴로워지고 새로운 업을 굳게 짓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올 한해 상도 없고 애착도 없고 욕심도 없는 청정일념으로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기원한다.
둘째는 생각한 것이 들어간다. 이것이 상사(想思)인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은 상(想)이고 더 깊이 고민하고 생각한 것은 사(思)이다. 우리가 아무개가 그립고 아무개가 밉다는 생각만 해도 그것이 다 들어간다. 누군가가 나를 멀리서 미워한다면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해도 영혼은 그것을 감지해서 저장한다. 자기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기 영혼 속에 안테나를 달아놓고 신기하게 뭐든 감각해서 저장하니까 남이 안 보는 곳에서 욕을 해도 전부 집수(執囚)하는 것이다. 우리의 업은 마치 작은 냇물이 큰 강물로 흘러가듯이 전생에 지어놓은 것은 나도 모르게 폭포수같이 업력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계속 들어가고 나가는 작용을 반복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지저분하고 못된 감각과 생각과 행동은 빠져나오고 금생의 성스러운 생각과 성스러운 작용은 많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좋은 업을 다시 저장하고 나쁜 업을 환류(還流)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나올 때는 전생에 저 사람과 원수였다면 금생에 그 사람을 보면 의식이 ‘저사람 고약한 사람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작용한다. 그래서 행동을 말로 하거나 무엇을 할 때 돌리자는 말씀이 참 좋은 마음 공부이다. 원망을 감사로 돌리고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고 이렇게 업보를 좋게 변형시켜서 저장하는 것이 업보 전환이다.
무슨 일이든지 감수불보(甘受不報)하라는 말이 있다. 달게 받는 것이 업을 소멸하는 길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달게 받지 못하고 ‘부모님은 왜 나를 이렇게 낳아줬어, 왜 세상은 나만 고통스럽게 하는 거야’하고 원망한다. 그러니 업은 업대로 받으면서 원망을 하다보면 원망의 업도 쌓이고 새로운 업도 짓게 된다. 스스로 괴로워지고 새로운 업을 굳게 짓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올 한해 상도 없고 애착도 없고 욕심도 없는 청정일념으로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