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암태도 - 최홍길 서울 선정고 교사
2024년 01월 11일(목) 00:00 가가
방학이 되면 필자는 학교의 허락을 받아 고향인 신안 자은도로 향한다. 우선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고, 고향을 포함한 주변 섬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이다. 퍼플섬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많은 수의 외지인들이 찾고 있었다.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쉴 수 있도록 바닷가 쪽에 3층 짜리 숙소를 완공했고, 지역의 문인들이 나무다리 곳곳에 목판 시화를 전시한 게 이채로웠다.
퍼플섬을 구경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암태도의 중심가에서 붕어빵을 사려는데 농협창고 외벽에 그려진 벽화 두 작품이 눈에 띄었다. 푸른색으로 드로잉을 한 농민들 여럿이 서 있는 모습, 다른 쪽에는 이 건물의 내부에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하려는 듯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 두 명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여태까지 면사무소 소재지에 소작인항쟁기념탑만 덩그러니 하나 있었을 뿐 전시관이나 기념관은 없었다. 어느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인근에 에로스 박물관이 오래전부터 들어서서 외지인들 또한 상당히 의아해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암태중학교 옆의 안 쓰던 농협창고를 개조하여 ‘암태소작쟁의 100주년 기념 전시관’이 드디어 문을 연 것이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분배 갈등이 쟁의의 원인이었기에, 미곡 창고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자체가 상징적이었다. 70여 평 크기인 전시관은 입구에서 시계 반대 방향을 따라 7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장 가운데의 철망을 활용한 설치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농민들은 지주의 압박과 일본의 통치에 이중으로 갇힌 셈이어서 이렇게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1920년대에 일제의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으로 지주의 수익이 줄어들자, 지주들은 소작료를 올려서 부족분을 보충하려 했다. 문 씨와 천 씨로 대표되는 암태도의 지주들도 소작료를 무려 8할까지 인상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 1923년 9월에 암태소작회를 결성하면서 소작료를 논 40%, 밭 30%로 하며, 불응하는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지 말 것 등을 결의했다. 협상을 시도하던 가운데 지주 측에서 소작인회 간부를 폭행하는 등의 일이 터지면서 쟁의가 확대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다음 해인 1924년 6월과 7월, 두 번에 걸쳐 주민 수백 명이 여러 척의 풍선(風船)을 타고 목포로 나가 농성을 이어갔다.
목포경찰서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앞에서 아사동맹까지 결의했다. 이는 결국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울·평양 등지에서 지원금이 답지할 정도였다. 마침내 일제는 더 이상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피하려고 목포경찰서장을 암태도로 보내 중재를 한 것이다.
암태도에서 불붙은 소작쟁의는 도초도와 자은도 등 신안군 섬 지방은 물론 전국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문 지주는 대오각성한 뒤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기도 하고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학원을 세우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수능에서 ‘한국사’는 필수과목인데다 1923년부터 1년 동안 진행되었던 암태도 농민항쟁은 출제 단골소재로 자리매김을 할 정도이다.
4년 전에 생긴 천사대교 덕택에 이제는 여객선을 타지 않고도 암태도를 갈 수 있게 되었다. 퍼플섬에서 바람을 쐰 뒤, 자녀들의 손을 잡고 기념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그날을 회고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리라. 게다가 동백꽃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어 기념하는 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여태까지 면사무소 소재지에 소작인항쟁기념탑만 덩그러니 하나 있었을 뿐 전시관이나 기념관은 없었다. 어느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인근에 에로스 박물관이 오래전부터 들어서서 외지인들 또한 상당히 의아해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암태중학교 옆의 안 쓰던 농협창고를 개조하여 ‘암태소작쟁의 100주년 기념 전시관’이 드디어 문을 연 것이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분배 갈등이 쟁의의 원인이었기에, 미곡 창고를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자체가 상징적이었다. 70여 평 크기인 전시관은 입구에서 시계 반대 방향을 따라 7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장 가운데의 철망을 활용한 설치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농민들은 지주의 압박과 일본의 통치에 이중으로 갇힌 셈이어서 이렇게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목포경찰서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앞에서 아사동맹까지 결의했다. 이는 결국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울·평양 등지에서 지원금이 답지할 정도였다. 마침내 일제는 더 이상 문제가 확산되는 것을 피하려고 목포경찰서장을 암태도로 보내 중재를 한 것이다.
암태도에서 불붙은 소작쟁의는 도초도와 자은도 등 신안군 섬 지방은 물론 전국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문 지주는 대오각성한 뒤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기도 하고 1941년에는 목포에 문태학원을 세우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수능에서 ‘한국사’는 필수과목인데다 1923년부터 1년 동안 진행되었던 암태도 농민항쟁은 출제 단골소재로 자리매김을 할 정도이다.
4년 전에 생긴 천사대교 덕택에 이제는 여객선을 타지 않고도 암태도를 갈 수 있게 되었다. 퍼플섬에서 바람을 쐰 뒤, 자녀들의 손을 잡고 기념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그날을 회고해 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리라. 게다가 동백꽃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어 기념하는 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