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을 남기는 억측-박진영 공감커뮤니케이션 대표
2024년 01월 04일(목) 00:00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아이가 엄마의 말을 자르고 한숨을 내쉰다.

엄마는 말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목소리를 키워 대꾸한다. “아니긴 뭐가 아냐!”

사춘기 자녀와 부모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보거나, 직접 경험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일찌감치 ‘아니긴 뭐가 아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드라마나 대중가요의 가사에 그 말이 흔히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긴 뭐가 아냐’로 끝나버리는 대화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할 말을 끝까지 못한 사람은 억울함에 잠을 못 이룰 만큼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한다.

마약 투여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던 배우 이선균씨가 얼마 전 삶을 버렸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이선균씨는 두달 여 간 경찰 조사를 받아왔다. 수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와 사건 관련자들의 지난 행적을 모르는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 그가 두달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을까? 소속사는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이 억울하지 않도록 억측이나 추측에 의한 허위사실 유포를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억측이 사람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을 때 억울함을 느낀다. 불공정한 대우에는 부당한 비난도 포함된다. 부당한 비난은 오해, 억측에서 비롯한다.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하는데 정보가 충분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판단의 근거가 되는 사실이나 증거가 없는데도 무리하게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밀어붙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것이 억측이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낀다. 필요한 정보를 찾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불확실성을 빨리 해소하려는 유혹에 넘어가면 억측에 빠지기 쉽다. 인간 사고의 약점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은 사람들이 논리적 추론 과정에서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로 확증편향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결과가 있을 때 자신의 소망에 맞춰 관찰과 경험을 편향적으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여러 사실 가운데 어떤 것은 주목하고 어떤 것은 무시하거나 다른 사실을 들어 반박하면서 자신의 편향에 따라 결론을 내려 버린다. 흔한 말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거봐 내 말이 맞지’라고 우기기 쉬운 존재다. 우리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모으거나,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주장할 때 편향된 방법을 동원한다. 합리적 사고를 하도록 훈련받은 전문가들도 확증편향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2009년 한 누리꾼이 가수 타블로의 스탠포드대학 졸업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학 졸업자 명단을 조사해보니 없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그 뒤 타블로의 학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의 약칭)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이 모여들어 타블로를 공격했다. 이에 타블로 본인과 지인, 심지어 스탠포드대학까지 나서서 타블로의 학교 졸업 증거를 내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증거를 내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카페 회원들은 ‘조작된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대며 묵살했다. 타블로는 오래 고통을 당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특히 어떤 사안을 두고 다툼이 벌어질 때, 내가 억측을 부리고 있지 않는가, 확증편향에 빠져든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억측과 확증편향은 대화를 중단시킨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과 육체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우리는 좀 더 들어야 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경청해야 한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란 말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아니라요~’라고 상대의 말을 끊지 말고 “제 말을 좀 들어주시겠어요?”라거나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아있는데요”라고 양해를 구하고 대화가 깨지지 않게 해야 한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해와 억울함에 갖혀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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