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밤 - 강정희 강진 대구중 교사
2023년 10월 31일(화) 00:00
우리 강진읍에 아트홀이 있어서 좋다. 건물 외관 디자인도 어여쁘고 너른 잔디 마당도 있다. 전시장과 공연장이 두 곳씩, 연중 전시회와 공연과 인문 강좌와 심포지엄이 열린다.

딩동, 휴대폰에 안내 문자가 온다. 13일 저녁 7시, 세상에… 연극이 온단다. 제목은 ‘내가 멜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당장 국어 톡방에 공유하고 함께 갈 아이들을 모집한다. 그리하여 1, 2학년 아들 둘 딸 둘, 넷을 데리고 문화마실을 간다. 청소년 대상 작품이 아니라 무대가 화려하거나 볼거리가 많은 건 아니라고 미리 알려준다. 여성 2인극으로 등장인물이 단출하고 고부간 관계를 다룬 내용이라 아이들이 지루해하면 어쩌나 혼자 속으로 걱정을 조금 한다.

자주 가는 친절한 읍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음식을 남기지 말자는 내 말을 기억하고, 식성대로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면 늘 하던 대로 테이블을 정리한다. 남은 국물을 큰 그릇에 붓고 크기가 같은 접시를 쌓고 수저를 모으고 사용한 냅킨은 나가면서 휴지통에 버린다. 그러니 사장님은 매번 우리에게 더 친절하다.

식사 후 아이들은 잔디광장을 지나 전시실로 향한다. 말하지 않아도 늘 하던 대로 그림을 감상한다. 오늘 전시는 강진이 고향인 강운 화가의 ‘구름과 물, 동시적 관조’, 진중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고 있던 녀석들은 ‘물 위를 긋다’ 연작 앞으로 나를 끌고 가 나름의 감상과 비평을 곁들여 안내한다.

2층으로 올라간다. 174석 아담한 소공연장에 손으로 꼽을 만큼 소수의 사람이 앉아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며 생각한다. 인생이 꿈이라면, 무대는 꿈속의 꿈일까? 연극은 과연 연극다웠다.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와 꼬부랑 노인이 된 엄마가 떠올랐다. 손자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셨던 할머니, 딸만 내리 다섯을 낳은 우리 엄마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할머니였다. 할머니 왜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 결말은 또 뭐임? 아이들도 있는데 울고 그러면 내 체면이 좀 아닌데.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시어머니 곽수정 배우, 며느리 박미정 배우, 박진성 연출자, 이 소담한 자리가 참 좋구나.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사회를 맡은 극단 청자 임재필 대표가 유리에게 마이크를 준다.

“국어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왔어요.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도중에 배우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연기하시는 게 좋았어요.”

아이다운 말이다. 아이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 나도 손을 번쩍 들었다. “청소년극이 아님에도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왔어요. 연극은 귀한 거잖아요.”

연극 한 편을 마음에 품고 돌아오는 길, 읍을 벗어나 가로등도 없는 국도에 접어든다.

쩡이: 자 이제 소감 나눔을 해야지. 누구부터 할까?(녀석, 내 말투를 흉내 내다니 )

쭌이: 시어머니가 갑자기 옷을 바꿔입고 젊을 때 모습으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재미있고, 저녁밥이 맛있었어요.(쭌이다운 발언)

유리: 도중에 배우들이 우리 곁으로 내려와서 말을 걸면서 연기하는 게 좋았어요.(그렇지.)

미니: 오늘 공연 감상으로 교실 수업 30시간 분량의 공부를 했습니다.(오!)

나: 시어머니가 ‘내가 죽으면…’ 하니까 며느리가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하잖아, 그게 바로 국어 시간에 배운 ‘복선’이야.(기어이 직업 본능) 내 발언은 어땠어?

아이들: 국어 선생님인데 당연히 잘하시죠.

으쓱! 아이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교사도 어쩔 수 없다.

야경이 멋진 가우도 출렁다리 앞 상저마을과 남호와 마량에 차례로 아이들을 내려준다. 신마마을 유리 집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자동차 불빛을 올려 뒷모습에 비춰준다. 딩동딩동! 곧 아이들의 감사 문자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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