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이 피로할 땐 말도 줄여야 한다 - 박진영 공감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2023년 10월 25일(수) 00:00
“애인에게 전 여자친구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어요. 두 번째는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한 20대 회사원이 내게 들려준 경험담이다. 술에 취해 그랬다고 한다. 그야말로 ‘술이 웬수’가 아닐 수 없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치고 취중 실언을 한번도 안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명인사가 취중에 한 실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간혹 일어난다. 2010년 10월 한 시의원이 일본 가나자와시를 방문해 만찬장에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건배사를 하다 ‘가미가제 만세’를 외쳐 큰 물의를 빚었다. 가미가제는 일본 군국주의 시절 허름한 비행기를 타고 적의 군함에 돌진하던 자살 특공대다. 2016년 한 신문사 기자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한 것이 드러나 세상을 흔들어놓은 교육부 고위 관리도 “취중에 나온 실언”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비교적 술에 관대한 편이다. 특히 남성들 사이에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술자리에서 끝낸다’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눈감아주는 데도 한도가 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 공직자의 취중 실언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술이 아니더라도 실언의 위험이 커지는 상황이 있다. 워싱턴포스트 과학담당 기자인 샹커 베단텀은 ‘숨겨진 뇌’(hidden brain)라는 말을 만들었다. 잠재 의식처럼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다양한 영향력을 말한다.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야 할 때, 의식적인 뇌와 숨겨진 뇌는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다. 매번 의식적인 뇌가 논쟁에서 승리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따르고 규범을 지키고 괜찮은 사람이란 평판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의식적인 뇌는 어떤 압박감 아래서 통제력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숨겨진 뇌가 작용해 평소 숨기고 있던 믿음과 태도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 숨기고 있던 믿음과 태도가 편견일 때는 지탄을 받게 된다. 스포트라이트와 카메라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종종 어리석고 황당한 편견을 드러내는 말을 하는 것은 숨겨진 뇌의 작용 때문이다.

2022년 4월12일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 유럽 예선 D조 8차전에서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대표팀이 맞붙었다. 북아일랜드가 0대 5로 크게 졌다. 케니 실스 북아일랜드 여자대표팀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자축구 경기를 보면 실점한 팀은 아주 짧은 시간 뒤 추가 실점하곤 한다. 여자축구 경기가 다 그렇다. 왜냐하면 소녀와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케니 실스 감독의 발언에 비판이 쏟아졌다. 자신의 팀이 한 번 실점하면 빠른 속도로 조직력이 무너진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는데 여성 차별적인 관념을 드러낸 게 문제였다. 북아일랜드는 선취골을 내준 뒤 와르르 무너졌다. 앞서 오스트리아와 경기에서도 후반전에 3골을 내주며 1대 3으로 졌다. 이런 패배가 이어지자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숨겨진 뇌’가 작용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 버린 사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무의식 속에 편견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동료 여직원을 살해한 사건을 두고 한 서울시 의원이 “좋아하는 걸 안받아주니까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고 말해 물의를 빚은 것도 비슷한 사례다.

나이를 먹고 뇌가 퇴화하면 우리의 통제력도 약해진다. 그러면 의식적인 뇌가 제어하고 있던 편견을 밖으로 드러내기 쉽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대학교의 윌리엄 폰 히펠의 연구에 따르면 노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통제하는 능력이 떨어질 때 편견을 드러낼 가능성이 커진다. 노인 환자들은 피곤해지는 오후에 ‘이유 없이 언쟁’을 벌일 가능성이 아침보다 세 배나 높았다고 한다. 노인시설에는 언제든 당을 보충할 수 있게 사탕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뇌는 인간 신체기관 가운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기관이다. 전체 에너지 소모의 약 20%에서 25%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거나 몸에 피로가 많이 쌓인 상황에서도 의식적인 뇌는 제 기능을 다 못할 수 있다. 경기에 패배한 운동선수들이 간혹 어이없는 말과 행동으로 지탄을 받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좋다. 그러니 심신이 피로할 때도 말을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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