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이 시장이라면 - 정경운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2023년 10월 10일(화) 00:00
예술인이 만든 도시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마을 길목에서도 작은 공연과 전시를 만날 수 있고, 예술인이 만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자동차로 가득 찬 도로 대신 나무 그늘을 따라 일터로 향하고, 퇴근 후엔 이웃 예술인들과 함께 마을공방에서 작품을 만들기도 하는 도시. 사람과 동물과 식물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도시. 혐오와 질시 대신 연대와 협력이 살아 있는 도시.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에 숨을 불어넣는 예술인들이 생존 걱정 없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그런 도시.

우리들의 상상이 지나치게 낭만적인가.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명은, 당대에 그들이 꿈꾸고 소망하고 상상하던 것들을 현실화 시켜온 결과물인 것을 말이다. 그래서 광주 시민도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만약 예술인이 시장이라면, 현재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란 상상이 그것이다.

지난 8월 31일 전남여고 체육관에서 ‘2023 백가쟁명’이 열렸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맞이하는 행사다. 백가쟁명은 예술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모여 광주시에 필요한 정책을 논의하고 발굴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발굴된 정책들은 시민투표를 거쳐 최종적으로 하나를 선정, 이를 광주시에서 실행하게 된다. 즉 시민이 제안하고 행정이 실현하는 상향식 정책 결정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책이 만들어지는 백가쟁명의 진행 과정은 만만치 않다. 올해 3월부터 광주문화재단에 예술인 및 현장 전문가들이 모여 시민 설문조사를 통해 가장 시급한 도시 문제들의 순위를 파악해 7개의 의제로 정리, 각 의제를 담당할 분과마다 시민들의 참여 신청을 받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3개월에 걸쳐 분과 워크숍을 진행한 결과, 분과를 대표하는 7개의 정당이 만들어지고 정당의 핵심정책이 정리되기까지 대략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7개의 정당 특성을 반영한 당명도, 그 정책도 흥미로웠다. 시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접근성 향상 제도(누구나 소중하당), 예술인의 권리보장을 대변할 수 있는 예술인의회 설립(안전공정예술당), 마을에서 차 없는 길을 만들어내는 제도(춤추는 대자보당),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문화예술 실험가 사업(문화예술일자리당), 기후와 환경을 위해 시민이 모일 수 있는 기후약방 지원(기후위기약당), 마을의 빈집을 문화예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광주형 스ㅋㅘㅅ’ 지원(같이삽시당), 장애인과 이주민 등 소수자의 예술 활동 지원(삶은 예술이당)이 그것이다.

백가쟁명 행사 당일, 시민들은 정당의 부스를 순회하며 설명을 듣고 미션도 해결해나가면서 정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갔다. 정당의 정책 발표도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당원들이 각종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투표 또한, 실제 선거처럼 기표소와 기표함을 만들어 진행했다. 모든 과정은 말 그대로 축제와 같았다. 우리나라 선거나 정치도 이렇듯 축제처럼 즐거운 것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2023년 백가쟁명에서 시민들이 최종 선택한 ‘올해의 정책’은, 안전공정예술당에서 제안한 ‘예술인의회’ 설립이다. 아마도 시민들은 우리가 꿈꾸는 도시를 위해, 가장 먼저 예술인들이 걱정 없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예술인의회가 설립될 수 있다면 예술인의 권리와 안전, 생활 등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혼자 외롭게 싸워나가야 하는 처연한 상황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예술인과 시민들이 만들고 선택한 정책 실행은 광주시의 몫으로 넘어갔다. 행사 과정을 광주시도 지켜봤으니, 시민들이 제안한 정책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파악했을 터이다. 이번 가을엔 예술인의회 설립을 위한 광주시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본다.

‘낙엽 하나로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광주시가 전해올 그 소식은 우리들의 상상이 현실화의 문턱을 넘어서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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