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기도 - 김정희 전남대 명예교수
2023년 10월 04일(수) 08:00 가가
인간은 누구나 생의 끝자락에 서면 한 번쯤 자기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그 삶에 대한 느낌은 허무하고 허탈할 뿐이다. 왜? 시작에서의 삶은 위대하고 소중했지만 마지막에서는 그 삶이 아주 소소한 의미로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삶의 시작과 끝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작과 끝은 근원적으로 하나로 연결된다. 삶의 각 단계들에서 인간은 독특한 사명과 변형, 멋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단계들의 독특한 위기와 질병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노년에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한꺼번에 체험하게 된다.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는 그 단계들의 체험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낙엽이 지듯이 우리 몸이 늙어간다. 삶의 단계들에서 우리의 마음은 슬퍼 말고 용감하게 작별을 고하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우리 안에 삶의 마법사가 우리를 보호하고 돕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향이 그리워지듯이 우리의 마음도 세상에 애착을 두게 된다. 그러나 마음아,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애착을 두지 말고 공간에서 공간으로 가볍게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세계정신에 의해서 지배되거나 속박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 삶의 기본 틀은 노년에 확실하게 드러난다. 노년은 고귀하고 값진 삶의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선 노인은 이웃의 소리를 경청하기 위한 여유를 가져야 하며, 성속(聖俗)의 강요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내면의 세계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며 그리고 소중한 추억들을 기억하고, 그 추억들을 평온 속에서 향유해야 한다.
그러나 늙어가는 과정에서 노년은 신체적 기력과 정신적 능력이 떨어져 노쇠와 질병만 증폭되고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므로 이러한 공간을 확장시키려면 노인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노년의 필수적인 덕목은 늙어감을 슬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늙어감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년의 은총이며 충만이다. 지금까지 많은 노인들이 이러한 늙어감의 과정을 몸소 체험했고 그러한 체험의 충만과 더불어 늙어감의 지혜와 사랑을 이웃에게 선물했다.
현대사회는 의학의 발전과 저출산으로 인하여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노년층’도 여러 단계로 구분된다. 은퇴를 기준으로 해서 아직은 정신적·육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젊은 노년층,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자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 그리고 노쇠 또는 치매와 같은 개체변화의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로 구분된다.
우리 사회는 노인들의 노쇠함과 가치를 구체적으로 고려하거나 올바르게 존중하는 공간을 아직은 기획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인의 수명은 길어졌지만 노인의 삶은 질적으로 아직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노인들이 공동체의 삶 속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질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노인의 삶은 모든 영역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이제 노인의 삶은 더 이상 사회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시간만 점점 더 늘고 있다. 노인은 결국 사회에 짐이 되며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도움의 요청은 바로 삶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젊었을 때 병들지 않을 것처럼 늙어감을 외면하고 살았다. 한데 정작 늙고 병들어 홀로 남게 되고서야 도움의 필요성을 인지하며 사회적 돌봄의 결핍을 지각한다. 이러한 도움의 요청은 바로 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선물이다.
노인의 존재는 당연히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대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문화에서 비롯된 사유의 결과 또한 젊음과 늙음을 갈라친다. 그래서인지 요즘 대다수 사람들은 젊음과 늙음을 갈라치는 것이 별로 나쁘지 않고 또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현대인들 스스로가 왕따문화와 소외문화에 마비되고, 소비문화에 깊숙이 매몰되어 버렸다.
젊음과 늙음을 가르는 문화는 상처와 나약함으로부터 공포를 확산시키기에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 노인의 존재가 무익하다고 노인을 젊은이로부터 떼어놓는다면 그런 문화에서 배우고 자란 젊은이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찌 양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인의 존재가 무시된 곳에서 우리의 양심은 선을 올바르게 작동시킬 수 없다.
“낙엽이 지듯이 우리 몸이 늙어간다. 삶의 단계들에서 우리의 마음은 슬퍼 말고 용감하게 작별을 고하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우리 안에 삶의 마법사가 우리를 보호하고 돕기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향이 그리워지듯이 우리의 마음도 세상에 애착을 두게 된다. 그러나 마음아,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애착을 두지 말고 공간에서 공간으로 가볍게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세계정신에 의해서 지배되거나 속박되지 않는다.”
노년의 필수적인 덕목은 늙어감을 슬퍼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늙어감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년의 은총이며 충만이다. 지금까지 많은 노인들이 이러한 늙어감의 과정을 몸소 체험했고 그러한 체험의 충만과 더불어 늙어감의 지혜와 사랑을 이웃에게 선물했다.
현대사회는 의학의 발전과 저출산으로 인하여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노년층’도 여러 단계로 구분된다. 은퇴를 기준으로 해서 아직은 정신적·육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젊은 노년층,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자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 그리고 노쇠 또는 치매와 같은 개체변화의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로 구분된다.
우리 사회는 노인들의 노쇠함과 가치를 구체적으로 고려하거나 올바르게 존중하는 공간을 아직은 기획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인의 수명은 길어졌지만 노인의 삶은 질적으로 아직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노인들이 공동체의 삶 속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질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사회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노인의 삶은 모든 영역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이제 노인의 삶은 더 이상 사회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시간만 점점 더 늘고 있다. 노인은 결국 사회에 짐이 되며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도움의 요청은 바로 삶에 속한다. 우리 모두는 젊었을 때 병들지 않을 것처럼 늙어감을 외면하고 살았다. 한데 정작 늙고 병들어 홀로 남게 되고서야 도움의 필요성을 인지하며 사회적 돌봄의 결핍을 지각한다. 이러한 도움의 요청은 바로 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선물이다.
노인의 존재는 당연히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대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문화에서 비롯된 사유의 결과 또한 젊음과 늙음을 갈라친다. 그래서인지 요즘 대다수 사람들은 젊음과 늙음을 갈라치는 것이 별로 나쁘지 않고 또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현대인들 스스로가 왕따문화와 소외문화에 마비되고, 소비문화에 깊숙이 매몰되어 버렸다.
젊음과 늙음을 가르는 문화는 상처와 나약함으로부터 공포를 확산시키기에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 노인의 존재가 무익하다고 노인을 젊은이로부터 떼어놓는다면 그런 문화에서 배우고 자란 젊은이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찌 양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인의 존재가 무시된 곳에서 우리의 양심은 선을 올바르게 작동시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