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사이’에 담긴 인생 철학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3년 08월 21일(월) 00:00
해가 뜨자 잠깐 사이 어둠이 물러나고 새가 울고 꽃이 핀다.

시멘트 계단 틈 사이에 작은 꽃이 피었다. 온통 시멘트인데 어찌 그 좁은 사이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을까. 트럭에 둥지를 튼 딱새 역시 이해할 수 없다. 그 많은 곳을 두고 하필 흔들리는 트럭에 둥지를 튼단 말인가.

잠깐 비가 온 사이 채소는 훌쩍 자라고, 나무는 천둥과 번개 사이에 자란다. 아이는 아침저녁 사이 크고, 여학생은 또 어느 사이에 아가씨 태가 난다. 청춘들은 울고 웃는 사이에 어른이 되고 성숙해진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애인 사이가 되고, 원수 사이가 이웃 사이가 되기도 한다.

산다는 일은 세상의 어느 구석, 곧 어느 사이를 차지해서 자기 집을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일이다. 우린 넓은 세상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좁은 틈 사이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로 잠깐 사이 머물다 가는지 모른다.

시간 못지않게 공간도 마찬가지다. 산과 산 사이, 집과 집 사이, 벽과 벽 사이에 방을 만들고 우주인 양 살아간다. 우리 집 바닥은 아래층의 천장이고 천장은 윗집의 바닥이다. 우린 그 사이에서 산다.

인간(人間)이란 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 즉 적절한 관계, 너무 가깝거나 멀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사이의 중요성을 내포한 말이다. 사람 사이에는 여백과 공백만 있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정이나 핏줄, 인연 등 끈끈한 연결고리가 많다. 그래서 그 관계 사이에서 행복해하거나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우리 신체도 사이사이 연결되어 있다. 손과 팔 사이 손목과 발과 발가락 사이 발목이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눈 역시 눈과 눈 사이로 보고, 걷는 일 역시 왼발과 오른발의 걷는 보폭, 곧 사이로 걷는다. 머리와 몸통을 잇는 사이가 목이고, 숨의 길목이다. 그러니 목숨을 건다는 것은 치열하게 끝장을 보겠다는 말이다.

살면서 중요한 것은 격을 갖추는 일이다. 예의나 교양은 몸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윗 입술과 아랫 입술 사이, 입에서 나온다. 그가 쓰는 말이 곧 그의 품격이다. 입술 사이는 밥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사람의 격이 말이 되어 나오는 곳이다.

수많은 사이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우리 삶을 이룬다. 우리 일상은 이런 수많은 시공의 사이와 사이라는 골조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비록 텅 빈 사이 같지만, 장자는 수레바퀴도 바큇살 사이가 있어 굴러가고, 하늘과 땅 역시 사이가 있어 수많은 생명이 살 수 있다고 했다.

사이는 숫자로 42다. 41과 43 사이. 4월 1일은 만우절이고 4월 3일은 제주 4·3 항쟁의 날이다. 이렇듯 우리 삶은 농담과 진실 사이를 오가며 사는지 모른다.

아침부터 밤 사이, 부모와 형제 사이, 광주와 서울 사이, 미움과 사랑 사이, 생과 사 사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

딱새가 트럭에 집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트럭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면 꼭 돌아오기에 알을 품을 수 있었고, 꽃은 그 선과 같은 사이가 있어서 그나마 씨앗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딱새는 트럭의 빈 곳, 사이가 가장 안전했고, 씨앗은 그 사이가 아니면 생을 피울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게다.

실상 그 꽃이나 그 새가 나 이거나 우리다.

인생은 그리 보니, 오늘과 내일 사이, 고민과 고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념과 현실 사이, 그 수많은 사이 사이를 그네처럼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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