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기억의 주인-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8월 14일(월) 00:00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한다면.

영화 안에서도, 영화 밖에서도 줄곧 따라다니는 질문이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고도 하고 ‘영화 바깥에서 다시 시작된다’고도 하는데,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인 듯 싶다. 사실 나도 몹시 궁금하다. 나의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억은 어떤 의미로 어떻게 간직하고 싶은지….

삶을 통틀어 무엇 하나를 골라낸다는 것, 쉽지 않다. 심지어 천국으로 가지고 갈 단 하나의 기억이라니. 아무리 돌아봐도 무엇을 선택할지 만만찮을뿐더러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도 자꾸 다른 게 또 아쉬워지니 그 역시 탐탁하지가 않다. 결국 어느 것도 선택을 못 하거나 매번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고레에다 히로카즈, 1998)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묻는 작품이다. 삶에서 제일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을 딱 하나만 골라보라는 것이 영화의 골자이거니와 영화 속의 영화가 될 그 물음은 작품 속 망자들뿐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던져질 수 있는 일상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망자들은 천국으로 가기 전 ‘림보’라는 중간역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림보의 직원들은 그들이 기억을 떠올리고 선택하는 것을 도우며 영화로 재현하는 일을 담당한다. 망자들은 행복 가득한 그 기억을 안고 림보를 떠나 천국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무엇보다 행복한 일이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문제와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사뭇 진지한 과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림보의 직원들은 유난스럽게 재촉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어느덧 깊은 사색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영화 속 인물들도 선뜻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돌아보면 온통 고통스럽고 싫은 기억뿐이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했던 순간이 너무 많은데 꼭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느냐 되묻는 사람도 있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선택을 거부하거나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망자들이 림보에 머무는 기간은 단 일주일, 고민하고 선택할 시간은 그보다 훨씬 짧다. 기억을 재현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 망자들은 정해진 일정에 따라 제 삶의 뒤안을 돌아본다.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윽고 망자들은 말한다. 통학길 버스 차창 너머로 불어오던 바람, 첫 비행의 순간에 빛나던 구름, 귀지를 팔 때 느껴지던 엄마의 포근한 무릎 감촉, 딸을 시집보내던 날, 대숲에서 먹었던 주먹밥, 빨간 드레스를 입고 춤추던 어린 시절…그때가 행복했다고.

영화는 기억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심하는 과정만 담은 것이 아니라 림보 직원들의 마음의 변화도 함께 보여준다. 림보의 직원들은 죽었으나 천국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정으로 림보에 남아 있는 그들 또한 망자들과 소통하며 심적 변화를 겪는다.

영화는 이처럼 기억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거를 참회하고 속죄하는 쪽에 무게를 두기보다 반추하고 추억하며 자신의 관점을 확보하는 쪽에 비중을 둔다. 스스로 돌아보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해석함으로써 삶의 혹은 기억의 주인이 되는 것.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자신만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단 하나의 기억만 선택해야 한다는 설정도 신선하지만, 그것을 영화로 재현해서 다시 보기 한다는 발상도 참신해 보인다. 말하자면 자신의 기억을 원천으로 자신만의 영화 한 편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행복하고 가장 소중한, 영원히 간직할 가장 아름다운 영화다. 영화(재현된 기억)는 새로운 질서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기꺼이 삶의 아름다움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영화는 다시 또 묻는다.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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