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를 기억하는 ‘금남로 문고’ - 성진기 전남대 명예교수
2023년 08월 03일(목) 00:00
“그냥 길을 걷는다. 무작정. 이른 아침의 慢步(만보). 띄엄띄엄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거리의 화단…, 말로만 듣던 ‘錦南路(금남로) 꽃길’에 들어서서 싱그러운 햇살과 옛 武珍州(무진주)의 향기에 물씬 젖는다. 어렸을 때 나를 키운 옛 고향, 오늘은 다시 그 흙을 밟으면서 짜릿한 母性(모성)에의 향수에 절로 취해본다. 錦南路 그 꽃길을…”

광주 사람 권일송(權逸松) 시인의 에세이 ‘한해지(旱害地)에서 온 편지’의 한 대목이다. 금남로에 꽃길이 있었는지 몇 사람이나 추억할까. 금남로라는 거리명이 이괄(李括)의 난에 공을 세운 광주의 열혈아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錦南’에서 유래한 사실을 몇 사람이나 기억할까.

광주에서 육십하고도 토를 달 만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걷고 돌아다닌 거리 이름을 대라면 금남로가 단연 일 번이다. 금남로를 돌아다니며 만들어진 추억들이 으쓱하면 수군대고 일어선다. 추억은 우리들의 자유로운 취사선택에 달려있다. 불쾌한 추억은 지우고, 즐거운 추억은 불러낼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은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호오(好惡)에 따라 지우고 불러오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안을 기억하지 않음은 잘 못된 것이다. 기억은 애초에 기억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들을 기억해 내는 사람들이 있으며, 역사 속에서 그 기억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요청한다. 지금 금남로를 걷는 우리는 어느 부류엔가 속해 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들의 금남로 기억은 우울한 것이 많다. 대학 초년에 4·19를 맞아 금남로에 몰려와 구호를 외쳤다. 군사정권 때도 금남로에 모여 대열을 지어야 했다. 80년 5월엔 금남로의 시민으로서 ‘폭도’로 몰려 자수하라는 방송을 들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우리들의 추억거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고통의 기억들이다. 따라서 기억은 망각을 불허한다.

언제부턴가 광주 사람들이 광주의 금남로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듯하다. 숱한 아픈 기억을 품고도 침묵하는 금남로의 외로움을 보듬는 기미가 미미하다. 작은 예로 금남로의 시작 지점 격인 구 도청 버스정류장 명칭이 ‘민주광장’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금남로의 의미를 과시하는 작은 팻말이 실종돼 버렸다.

김지하 시인은 ‘황토’에서 이렇게 말한다.

“뜨거운 불꽃 같은 사랑의 언어,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 왔다. 사랑의 상실, 대상에 대한 무관심, 그 권태야말로 모든 우리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광주의 금남로에 대해 권태로운 걸까. 그래서 금남로의 역사 기억을 포기한 건가. 섭섭한 일이 아닐까.

이런 이유로 광주 역사의 현장인 금남로에, 금남로를 진지하게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금남로 문고(文庫)’를 제안해 본다. 이 문고는 단순한 도서관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광주의 역사와 광주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담아내는 문헌과 자료를 모아 배우고 익히자는 구상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녹여내는 대화와 소통의 공간으로 쓰일 수도 있다. 빌딩 속의 아고라를 실현해 보자는 발상이기도 하다.

금남로에 문고를 설치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님을 모를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 사람들의 의식과 의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철학 얘기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의 지도자가 나서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재현을 시도하기도 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연구소’는 독지가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철학사의 큰 획을 그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뤄 냈다.

우리 광주 금남로에 시민의 자랑거리 ‘금남로 문고’하나 만드는 게 몹시 어려울까? 그렇더라도 금남로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광주시민의 자존감을 제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이 든 한 시민의 ‘여름밤의 꿈’에 공감하는 분이 계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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