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뻐꾸기-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7월 31일(월) 00:00
뻐꾸기는 늘 멀리에서 운다. 가까이 있어도 어쩐지 멀찍이서 우는 듯 아련하게 들린다. 산이 코앞에 있는데도 뻐꾸기는 왜 이 산의 새가 아니라 저 산의 새처럼 느껴지는 걸까.

자려고 누웠는데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한밤중에 무슨 소릴까 싶지만 분명히 뻐꾸기 울음이다. 뻐꾹 뻐꾹… 애조 띤 소리가 자꾸 마음을 헤집는다. 저 뻐꾸기는 왜 잠도 자지 않는 걸까. 새벽에도 울고 한낮에도 울고…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것이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공연히 뻐꾸기 우는 사연이 궁금하다.

뻐꾸기는 늘 혼자서 운다. 고독한 단독자처럼 혼자서 구슬프게 운다. 물론 이산 저산 뻐꾸기가 서로 화답하듯 주고받을 때도 있다. 그런 때도 뻐꾸기는 홀로 울었다. 뻐꾹 뻐꾹…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소리가 어찌나 애달픈지 사람들도 그냥 흘려들었을 리 없을 성싶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적잖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시어머니 구박에 죽은 며느리의 원혼이고, 계모에게 맞아 죽은 원통한 딸의 넋이고, 하늘나라로 되돌아가지 못한 나무꾼의 애처로운 사연이고…. 모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한 맺힌 소리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의 소리, 슬픔과 원망의 소리라고 해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싱잉볼 음악처럼 고요해진다. 아름답고 슬픈, 고요한 여백이 생긴다.

한데, 뻐꾸기에게는 늘 오명이 따른다. 얌체니 깡패니 사기꾼이니 하는 부정적인 이름들. 한마디로 ‘나쁜 놈’이라는 것인데, 그건 바로 자기 둥지에 알을 낳는 게 아니라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탁란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 대다수 새가 둥지를 틀어 새끼를 기르는 일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데 비해, 뻐꾸기는 개개비나 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 얌체 짓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숙주 새가 낳은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 아래로 떨어뜨려 버린다. 그리하여 숙주 새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그 새는 제 새끼를 모두 죽인, 저보다 큰 뻐꾸기 새끼를 정성껏 돌보게 되는데…, 성장한 뻐꾸기는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황당하고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날아가는 뻐꾸기를 잡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허, 참!

뻐꾸기의 모든 것을 파헤칠 듯 나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다. 한밤중에 굳이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포노사피엔스, 스마트폰이 나의 선생이다. 잠은 안 오고 하릴없이 선생에게나 기댄다.

여하튼, 뻐꾸기는 왜 그런 ‘짓’을 일삼는 걸까? 뻐꾸기에게도 혹시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걸까? 하기야 무엇이든 한쪽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는 일, 당연히 뻐꾸기의 사정도 들어봐야겠지.

탁란의 시작은 우선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키우는 것보다 남에게 맡기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부리가 날카롭고 몸이 평평한 뻐꾸기는 가슴의 가로줄 무늬와 다리를 덮은 털이 맹금류와 닮았지만, 비행 실력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뿐 아니라 다리 근육도 발달하지 않아 둥지를 만들기 어렵고 알을 품는 능력도 결핍되어 있다. 그러니 제힘으로 둥지를 틀어 새끼를 기른다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게다가 뻐꾸기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철새’가 아닌가. 그렇지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 것은 지상의 과제! 그건 뻐꾸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불가피한 문제일 뿐.

이윽고 그는 꾀를 짜낸다. 저기 저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 둥지가 어떨까? 이리 살피고 저리 살핀 뻐꾸기가 드디어 뱁새 둥지에 슬쩍 제 알을 낳고선 멀찌감치 날아간다. 순진한 뱁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만 이내 의심을 거두고서 온 정성으로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른다. 뻐꾸기는 드디어 미션 성공! 시험 삼아 해본 것이 의외의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이제는 직접 새끼를 기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뻐꾸기는 그 생태적 특성상 탁란을 할 수밖에 없는 슬픈 새인가?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해서라도 생명을 이어 가야 하는 존재하는 것들의 슬픈 자화상인가? 그리하여 저 울음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의 애타는 모정인가? 불안과 초조와 근심이 서린 어쩔 수 없는 울음인가? 혹은 험한 세상에 자식을 내보낸 모든 어미의 울음을 대신한 것인가? 두서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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