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난전(人固難全)과 자살- 황옥주 수필가
2023년 07월 27일(목) 23:00 가가
‘인고난전’(人固難全)은 사자성어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친숙한 단어도 아니다. 보통 사전에는 올라있지도 않다.
오래전 부산 지인이 부산고전연구회가 엮은 동양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기에 부러워했더니 논어, 중용, 대학, 명심보감 등의 해설서를 보내 주셨다. 모두 조양숙 씨가 강설하시고 동아대학교 이동춘 교수님이 엮었다. 고마운 것은 물론, 어찌나 재밌던지 우각괘서(牛角掛書)는 아니더라도 틈나는 대로 펼쳐 보고 있다. 그 ‘논어강설’ 헌문편(174쪽)에서 처음으로 본 단어가 ‘인고난전’이다.
중국 ‘여씨춘추’에 나온 말로 “사람은 진실로 완전하기 어렵다”는 뜻이라 했다. 여씨춘추는 진나라 장양왕 즉위에 공을 세우고 그 아들 시 황제 때 재상인 여불위가 식객 삼천 명에게 맡겨 엮은 일종의 백과전서로 알려져 있다.
동양고전 속에는 사자성어나 명구들이 수도 없다. 그중 이 ‘인고난전’이 잊혀지지 않은 것은 머지않은 과거에 한 국회의원과 청빈하다 알려진 서울시장 자살 사건이 포개져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구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으랴만 이분들 죽음은 더 가슴이 아팠다.
사람은 신의 피조물이다. 태어남도 죽음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때문에 인간은 신이 아니다. 만약 누가 신처럼 완전하기를 바란다면 그건 부질없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알았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세상을 향해 용서를 구해야 옳다. 자살이 탈출 창구로 보일라치면 그때는 이미 늦다. 당사자는 죽음이면 그만이라 여길지 모르나 자살은 누군가에게 멍에를 씌운 죄악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인생이 길면 얼마나 길겠는가. 가만있어도 찾아올 죽음이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한 면려(勉勵)라야 진짜 노력이다.
라오다메이아는 트로이의 사령관 헥토르의 화살에 맞아 첫 사망자가 된 프로테실라오스의 아내다. 신혼 초에 남편을 전쟁에 보내 놓고 너무 보고 싶어 납상(蠟像)을 만들어 품고 잤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원통한 그녀는 제우스신에게 애원했다. 애걸하는 여인을 불쌍타 여긴 제우스는 망령 무리에 섞여 있는 남편을 찾아다가 납상에 넣어 주었다. 납상은 곧 남편으로 변했고 꿈 같은 세 시간이 지나자 부인은 남편 품에 안긴 채 칼로 스스로 제 가슴을 찔러 남편 망령을 따랐다. 신화 속 얘기지만 자살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련의 행위는 노력으로 보아도 괜찮지 않나 싶다. 남편의 팔에 안겨 하늘로 오르는 아내 된 자의 미소가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아아 저녁이 되면/ 자살을 못하기 때문에/ 술집이 가득 넘치는 도심(都心)’ 우리 고장 고 박봉우 시인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란 시다. 밤에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누구의 조사인지는 몰라도 흥미로운 통계다.
‘휴전선’이란 이름이 생겨난 이래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믿음과 믿음이 없는 얼굴들이 수십 년간 맞서 노려보고 있다. 나는 살아야 하고 너는 죽어야 한다며 공존이 인정되지 않은 곳이다. 노루 사슴들도 마음대로 넘나들기 어려운 휴전선! 한치 앞이 죽음의 나락이다. 죽음은 대의를 위할 때라야 가치가 있다. 국가 민족을 위해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자살의 망령은 이 순간도 허공을 떠돌고 있다. 존경받은 정치가가 단돈 몇 천만 원에 죽었다고 아깝다 여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TV에 보이지 않았으면(죄송) 좋겠다는 얼굴도 있을 것이다. 환락가 어느 곳에서는 비 내리는 밤에도 향내 짙은 여인들과 희롱을 주고받는 고관대작이 있을 것이다. 땀의 소중함밖에 모르는 선량한 국민들은 상상도 못할 수작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함은 학문 말고라도 인간의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고난전’을 알고 수신을 했더라면 허무한 자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슬픈 희나리 군상이 바로 이웃에서 죽어가도 높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돈에 눈이 가려서일까?
누군가가 자살하면 그 의자는 내 것이라고 속으로 박수치고 웃을 자 많을 터이다. 친구도 동지도 의리도 글자로만 존재한 요지경 세상이다. 자살한 자만 서럽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도 악착같이 살고 볼 일이다.
오래전 부산 지인이 부산고전연구회가 엮은 동양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기에 부러워했더니 논어, 중용, 대학, 명심보감 등의 해설서를 보내 주셨다. 모두 조양숙 씨가 강설하시고 동아대학교 이동춘 교수님이 엮었다. 고마운 것은 물론, 어찌나 재밌던지 우각괘서(牛角掛書)는 아니더라도 틈나는 대로 펼쳐 보고 있다. 그 ‘논어강설’ 헌문편(174쪽)에서 처음으로 본 단어가 ‘인고난전’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알았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세상을 향해 용서를 구해야 옳다. 자살이 탈출 창구로 보일라치면 그때는 이미 늦다. 당사자는 죽음이면 그만이라 여길지 모르나 자살은 누군가에게 멍에를 씌운 죄악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인생이 길면 얼마나 길겠는가. 가만있어도 찾아올 죽음이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한 면려(勉勵)라야 진짜 노력이다.
라오다메이아는 트로이의 사령관 헥토르의 화살에 맞아 첫 사망자가 된 프로테실라오스의 아내다. 신혼 초에 남편을 전쟁에 보내 놓고 너무 보고 싶어 납상(蠟像)을 만들어 품고 잤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남편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다. 원통한 그녀는 제우스신에게 애원했다. 애걸하는 여인을 불쌍타 여긴 제우스는 망령 무리에 섞여 있는 남편을 찾아다가 납상에 넣어 주었다. 납상은 곧 남편으로 변했고 꿈 같은 세 시간이 지나자 부인은 남편 품에 안긴 채 칼로 스스로 제 가슴을 찔러 남편 망령을 따랐다. 신화 속 얘기지만 자살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련의 행위는 노력으로 보아도 괜찮지 않나 싶다. 남편의 팔에 안겨 하늘로 오르는 아내 된 자의 미소가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아아 저녁이 되면/ 자살을 못하기 때문에/ 술집이 가득 넘치는 도심(都心)’ 우리 고장 고 박봉우 시인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란 시다. 밤에 자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누구의 조사인지는 몰라도 흥미로운 통계다.
‘휴전선’이란 이름이 생겨난 이래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믿음과 믿음이 없는 얼굴들이 수십 년간 맞서 노려보고 있다. 나는 살아야 하고 너는 죽어야 한다며 공존이 인정되지 않은 곳이다. 노루 사슴들도 마음대로 넘나들기 어려운 휴전선! 한치 앞이 죽음의 나락이다. 죽음은 대의를 위할 때라야 가치가 있다. 국가 민족을 위해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자살의 망령은 이 순간도 허공을 떠돌고 있다. 존경받은 정치가가 단돈 몇 천만 원에 죽었다고 아깝다 여긴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TV에 보이지 않았으면(죄송) 좋겠다는 얼굴도 있을 것이다. 환락가 어느 곳에서는 비 내리는 밤에도 향내 짙은 여인들과 희롱을 주고받는 고관대작이 있을 것이다. 땀의 소중함밖에 모르는 선량한 국민들은 상상도 못할 수작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함은 학문 말고라도 인간의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고난전’을 알고 수신을 했더라면 허무한 자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슬픈 희나리 군상이 바로 이웃에서 죽어가도 높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돈에 눈이 가려서일까?
누군가가 자살하면 그 의자는 내 것이라고 속으로 박수치고 웃을 자 많을 터이다. 친구도 동지도 의리도 글자로만 존재한 요지경 세상이다. 자살한 자만 서럽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도 악착같이 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