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까마귀 -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7월 17일(월) 00:00
그는 깃도 부리도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다. 검지 않은 데가 한 군데도 없다. 그의 검은 외피는 딱하게도 슬프다. 목청마저 괄괄하고 음습하다. 그를 의미하는 글자 ‘烏’(오: 까마귀)는 몸이 검어 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鳥’(조: 새)의 눈 부분의 한 획을 생략한 글자라고 한다.

그는 환대는커녕 배척받고 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유독 그에게 인색했다. 그의 검은 날개는 저승사자의 옷자락이라도 된 듯 꺼리고 외면했으며, 크고 굵은 울음소리는 불행의 전조인 듯 재수 없게 여겼다. ‘까마귀 노는 골에는 가지도 말라’ 선을 그었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그뿐인가. 해야 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공연히 까마귀 고기를 먹었다느니 애먼 탓을 했다.

이쯤 되면 그의 명예는 송두리째 훼손되어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득히 먼 이야기이긴 해도 그는 태양신의 사자로서 신들의 전령임을 자부했고, 삼족오(三足烏)라 불리며 국조로 대접받기도 했다. 견우직녀의 애틋한 사랑에 제 몸을 내어 주기도 했으며, 어미에게 극진히 보답하는 반포지효(反哺之孝)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썩은 것들을 먹어 치워 환경 정화에 일조했고, 장대 위에 높이 올라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도 했다. 깊은 산골 외로운 노인에겐 반가운 친구가 되었고, 길 가던 행인에겐 뜻밖의 선물이기도 했다. 저문 들녘, 떼 지어 날아오른 그들의 군무는 얼마나 황홀하던가.

나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한적한 산길엔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고 인적마저 흩어지고 없었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나무와 마른 풀들, 들리는 것은 새소리뿐이었다. 새소리는 맑고 투명하고 여리고 부드러웠다. 듣는 귀도 걷는 발걸음도 덩달아 가붓해지는, 깨끗하고 어여쁜 소리였다.

어느 순간 새들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천지사방엔 고요만 가득했다. 그 사이로 불쑥 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크고 굵고 묵직한 소리였다. 나뭇가지들이 출렁 흔들리고 고요도 저만치 달아났다. 검은 새 몇 마리가 머리 위에서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까악까악까악까악… 온 산을 휘저어 놓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들은 다시 또 울었다. 까악까악까악까악…. 우는 소리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투가리 깨지듯 거칠고 둔중한 소리가 은근히 귀여웠다.

이윽고 갈맷빛에 둘러싸인 높은 산마루. 탁 트인 산정은 넓고 푸르렀다. 뜻밖에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아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혹시 무엇에 홀린 것은 아닐까? 사뭇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멀리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거나 뭔가를 먹고 마시거나 도란도란 담소 중이었다. 나는 표지석을 지나 중앙에 세워진 높다란 돌탑 쪽에 앉았다. 몸도 마음도 느슨하게 산 위의 시간을 즐겨볼 셈이었다. 높이 1500미터가 넘는 고산인데도 마치 양지바른 담장에 기댄 듯 따스하고 편안했다.

몇 발쯤 떨어진 바위 위, 한 까마귀가 먹이를 쪼고 있었다. 사람들이 던져준 빵이며 귤 따위였다. 그는 먹는 틈틈이 이쪽을 노려봤다. 난간에 먹을 것을 올려놓으면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낚아채 가곤 했다. 한 까마귀는 돌탑 위에 앉아 있었다. 돌탑 가운데 뾰족이 솟은 바위 끝에 앉아 어느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도 같았다. 그는 텅 빈 허공을 배경으로 솟대처럼 솟아 있었다. 그의 날개는 접혀 있었고, 굳게 다문 부리는 과묵해 보였다. 그의 눈은 광야를 달려온 무사의 안광인 듯 빛났으며, 그의 몸은 오묘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고 어떤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그는 정지하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창공을 날 것처럼 보였다.

어떤 까마귀는 먹이를 쫓고 어떤 까마귀는 솟대가 되었다. 먹이를 쫓다가 솟대가 되기도 하고, 솟대였다가 먹이를 쫓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먹이를 쫓는 자에겐 먹이로 희롱하고, 높이 좌정한 자에겐 머리를 조아렸다. 어떤 까마귀는 비루하고 어떤 까마귀는 고고해 보였으나, 둘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뒤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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