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 초대석] 김지연 사진가·서학동 사진미술관 관장
2023년 07월 04일(화) 01:05 가가
“우리 삶에서 잊혀져가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하죠”
남광주역, 정미소, 묏동, 동네 구멍가게, 낡은 방, 광주극장…
덧없이 사라져가는 우리 주변의 것들 25년 동안 앵글에 담아
문화와 마을공동체 융합…“목적은 없어요, 그냥 살아가는 것”
남광주역, 정미소, 묏동, 동네 구멍가게, 낡은 방, 광주극장…
덧없이 사라져가는 우리 주변의 것들 25년 동안 앵글에 담아
문화와 마을공동체 융합…“목적은 없어요, 그냥 살아가는 것”


전주 서학동사진미술관 김지연 관장은 사진가이자 전시 기획자이다. 25년간 정미소·근대화상회 등 주변에서 사라지는 소중한 가치들을 카메라에 담아왔고, 마을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전시를 선보였다.
남광주역과 정미소, 이발소, 묏동(묘지), 마을이장, 근대화 상회(동네 구멍가게), 낡은 방, 빈방, 삼천 원의 식사, 자영업자, 택배, 영산강, 광주극장….
광주 출신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지연(75) ‘서학동 사진미술관’ 관장은 지천명에 사진을 배운 후
우리 주변에서 덧없이 사라져 가는 대상들을 25년 동안 열정적으로 앵글에 담아오고 있다. 낡은 정미소와 한옥을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와 ‘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만들어 ‘문화’와 ‘마을 공동체’를 융합시켰다. 기억의 수집자’이자 ‘아키비스트’(archivist·기록보관자)인 작가의 예술세계와 ‘공동체의 기억 아카이브’에 대해 들어본다.
◇‘개관 10돌 맞은 서학동 사진미술관’
“오랫동안 전주에 대해서 사진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근래에 전주시 외곽지대에 솟아오르는 아파트 건물들의 기세를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전주가 가지고 있는 작은 골목과 사소한 일상을 찾아서 담아보기로 했다. 전주에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주이기에 가질 수 있는 정서를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기 때문이다.”
김지연 관장은 지난 5월 한 달간 ‘전주의 봄날’전을 개최했다. 같은 제목의 사진집 출판과 ‘서학동 사진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제1 전시장 입구에 붙여진 ‘전주의 봄날’ 작가의 말에서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김 관장은 지난 2013년 3월, 지어진 지 40여 년 된 낡은 한옥을 매입해 전시장으로 개조한 후 사진으로 소통하는 문화공간인 ‘서학동 사진관’(지난 해 3월, ‘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꿨다)을 개관했다. ‘한 사진가의 무모한 도전으로 근대유산을 마을문화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최초의 사례’인 진안군 마령면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에 후속하는 두 번째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현재, 비영리로 운영해온 ‘서학동 사진관’은 지역의 척박한 문화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문화예술의 고아(高雅)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다.
-‘서학동 사진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았습니다. 처음 어떻게 해서 열게 되셨나요?
▲“2006년에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열었다가 ‘힘이 부쳐서’ 2012년에 (잠정적으로) 문을 닫았었죠. 이런 걸 다시는 안 하려고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한옥마을 집값이 솟으면서 작가들이 서학동으로 터를 옮기는 추세였어요. 그러던 차에 이 집을 발견하고 솔깃한 생각이 또다시 들었어요. 계남정미소같이 허허벌판에서도 이뤄냈는데, (전주에서) 낙후된 지역이고, 골목인데도 불구하고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맛집은 어디에 있든 찾아 가거든요. 그처럼 훌륭한 전시를 하면 어디서든 찾아올 것이다, 생각을 하고 전시에 집중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유명한 사진가들을 초청해서 서울에 가지 않고도 (좋은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려했습니다.
-지난해 3월에 ‘서학동 사진관’을 ‘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재개관하면서 새롭게 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2020년께 되게 아파서 이걸 계속해서 운영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서양화가 이일순 대표가 새롭게 맡으면서 초청도 하고, 기획도 하지만 대관 형식으로 하면서 (공간) 자체를 운영하려 합니다. (사진 외) 다른 장르를 하는 작가들이 전시를 하고 싶어 해요.”
-‘전주의 봄날’ 전시 작품 가운데 ‘남천교에서 바라본 전주천’(2022년)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전주천 좌우로 초록빛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멀리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한복차림의 청춘 남녀 7명의 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이 작품만은 액자 둘레를 검은 색으로 하셨습니다.
▲“기왕에 전주에 이런 문화공간을 마련했으니까 조금 더 전주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생각을 해서 2013년에 여기 오자마자 찍기 시작했어요. 작년 가을에 남천교를 지나다가 이 사진을 찍었는데, (전주시가) 그걸 올 3월에 홍수 핑계로 하루아침에 베어버린 거예요. 시민 공청회 같은 그런 절차도 없이…. 액자 틀을 검은 색으로 한 건 애도와 항변이죠. 언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소멸될 수 있는 것이구나, 좀 새삼스럽더라고요.”
◇근대~현대 이르는 공동체의 쇠락·소멸 기록
광주 출신인 김지연 사진가는 지천명(知天命)에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20대 시절, 드라마센터(서울예전 전신)에서 연극을 공부했지만 결혼한 후에는 아이들을 키우는 평범한 주부로 생활했다. 남들보다 늦깎이로 사진을 시작했지만 25년 동안 매진하며 자기만의 사진세계를 창조했다. 그동안 치열하게 작업해온 남광주역과 정미소, 이발소, 묏동(묘지), 마을이장, 근대화 상회(동네 구멍가게), 낡은 방, 빈방, 삼천 원의 식사, 자영업자, 택배, 영산강, 광주극장 등은 일맥상통한다.
1999년께 사진을 배우며 ‘처음으로 맘먹고 시작한 사진작업’은 남광주역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로 20년 뒤인 2019년 7월 광주 시립 사진전시관에서 ‘남광주역 마지막 풍경’전을 열었다.) 또한 사양길로 접어들어 사라지고 있던 ‘정미소’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난 2001년부터 발품을 들여 전북지역에 산재한 100여 곳의 정미소를 찾아 촬영해 이듬해 첫 개인전을 열고 사진가로 데뷔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록성’과 ‘사회성’이다. 한발 앞서 우리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자영업자와 택배기사, 이발사, 이장 등을 기록했다. 사진가로서 진정한 의미의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다. ‘나는 이발소에 간다’전(2004년)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명예도 없고 돈도 별로 못 버는 일에 일생을 바쳐온 한 사람 한 사람 직업인을 기억하는 일, 마을 한 모퉁이에서 동네 사람들의 모양새를 내주고 응접실 역할까지 해온 시골이발소를 기록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경민 사진평론가·기획자는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2013년)중 ‘계남정미소와 10년간의 기록’에서 “사진가 김지연은 기억의 수집자이자 아키비스트(archivist·기록보관자)”라며 “그가 촬영하거나 수집한 사진자료는 개인의 기억에서 마을의 기억으로 그리고 동시대를 산 많은 사람들의 공통 기억으로 이어지는 기억 아카이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작가들의 응원, ‘서학동 언니 프로젝트’
김지연 관장은 매번 사진 작업을 할 때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이번 ‘전주의 봄날’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십부터 25년 동안 다큐사진의 한길을 걸어왔다. 언젠가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뭐가 나온다고 이런 고생을 할까?’ 수십 번 반문을 했다고 한다. 결론은 DNA였다. 1950년대에 전 재산을 털어 광주시 남구에 진남중학교(4회 졸업생 배출)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다 파산해버린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릴 적 떠난 고향을 60여년 만에 찾아 ‘영산강’ 사진작업을 한 그는 “나에게 중요한 것은 강의 근원지와 종착지가 아니라 내가 살던 곳의 강물이었다”며 “영산강은 나의 사적인 연민과 회귀의 장소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서학동 사진미술관’의 행사 가운데 ‘서학동 언니 프로젝트’가 눈길을 끈다. 사진기획자들과 사진가, 후배 작가들이 ‘서학동 사진관’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연대와 응원 릴레이다. 1탄 ‘응달꽃은 짙다’(2015년 7월), 2탄 ‘Open-end(ed)’(2016년 5월), 3탄 ‘즐거운 일기’(2017년 6월), 4탄 ‘상춘(賞春)’(2018년 3월) 등 모두 4차례 진행됐다. 앞으로 작가는 어떤 사진 작업을 구상할까, 우문(愚問)을 던져본다.
“솔직히 거의 모든 작품을 할 때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애초부터 작가가 되려고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죠. 보통 작가들 같은 목적도 없었어요. ‘계남정미소’도, ‘서학동 사진관’도 무슨 목적 없이 했어요. 사실은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광주 출신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지연(75) ‘서학동 사진미술관’ 관장은 지천명에 사진을 배운 후
◇‘개관 10돌 맞은 서학동 사진미술관’
“오랫동안 전주에 대해서 사진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근래에 전주시 외곽지대에 솟아오르는 아파트 건물들의 기세를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전주가 가지고 있는 작은 골목과 사소한 일상을 찾아서 담아보기로 했다. 전주에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주이기에 가질 수 있는 정서를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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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2010년) |
▲“2006년에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를 열었다가 ‘힘이 부쳐서’ 2012년에 (잠정적으로) 문을 닫았었죠. 이런 걸 다시는 안 하려고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한옥마을 집값이 솟으면서 작가들이 서학동으로 터를 옮기는 추세였어요. 그러던 차에 이 집을 발견하고 솔깃한 생각이 또다시 들었어요. 계남정미소같이 허허벌판에서도 이뤄냈는데, (전주에서) 낙후된 지역이고, 골목인데도 불구하고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맛집은 어디에 있든 찾아 가거든요. 그처럼 훌륭한 전시를 하면 어디서든 찾아올 것이다, 생각을 하고 전시에 집중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유명한 사진가들을 초청해서 서울에 가지 않고도 (좋은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려했습니다.
-지난해 3월에 ‘서학동 사진관’을 ‘서학동 사진미술관’으로 재개관하면서 새롭게 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2020년께 되게 아파서 이걸 계속해서 운영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서양화가 이일순 대표가 새롭게 맡으면서 초청도 하고, 기획도 하지만 대관 형식으로 하면서 (공간) 자체를 운영하려 합니다. (사진 외) 다른 장르를 하는 작가들이 전시를 하고 싶어 해요.”
-‘전주의 봄날’ 전시 작품 가운데 ‘남천교에서 바라본 전주천’(2022년)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전주천 좌우로 초록빛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멀리 놓여있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한복차림의 청춘 남녀 7명의 모습을 포착한 작품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이 작품만은 액자 둘레를 검은 색으로 하셨습니다.
▲“기왕에 전주에 이런 문화공간을 마련했으니까 조금 더 전주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생각을 해서 2013년에 여기 오자마자 찍기 시작했어요. 작년 가을에 남천교를 지나다가 이 사진을 찍었는데, (전주시가) 그걸 올 3월에 홍수 핑계로 하루아침에 베어버린 거예요. 시민 공청회 같은 그런 절차도 없이…. 액자 틀을 검은 색으로 한 건 애도와 항변이죠. 언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소멸될 수 있는 것이구나, 좀 새삼스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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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주 마지막열차’(2000년) |
광주 출신인 김지연 사진가는 지천명(知天命)에 ‘자신의 존재감’을 찾고,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20대 시절, 드라마센터(서울예전 전신)에서 연극을 공부했지만 결혼한 후에는 아이들을 키우는 평범한 주부로 생활했다. 남들보다 늦깎이로 사진을 시작했지만 25년 동안 매진하며 자기만의 사진세계를 창조했다. 그동안 치열하게 작업해온 남광주역과 정미소, 이발소, 묏동(묘지), 마을이장, 근대화 상회(동네 구멍가게), 낡은 방, 빈방, 삼천 원의 식사, 자영업자, 택배, 영산강, 광주극장 등은 일맥상통한다.
1999년께 사진을 배우며 ‘처음으로 맘먹고 시작한 사진작업’은 남광주역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들로 20년 뒤인 2019년 7월 광주 시립 사진전시관에서 ‘남광주역 마지막 풍경’전을 열었다.) 또한 사양길로 접어들어 사라지고 있던 ‘정미소’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난 2001년부터 발품을 들여 전북지역에 산재한 100여 곳의 정미소를 찾아 촬영해 이듬해 첫 개인전을 열고 사진가로 데뷔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록성’과 ‘사회성’이다. 한발 앞서 우리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자영업자와 택배기사, 이발사, 이장 등을 기록했다. 사진가로서 진정한 의미의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다. ‘나는 이발소에 간다’전(2004년)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명예도 없고 돈도 별로 못 버는 일에 일생을 바쳐온 한 사람 한 사람 직업인을 기억하는 일, 마을 한 모퉁이에서 동네 사람들의 모양새를 내주고 응접실 역할까지 해온 시골이발소를 기록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경민 사진평론가·기획자는 ‘정미소와 작은 유산들’(2013년)중 ‘계남정미소와 10년간의 기록’에서 “사진가 김지연은 기억의 수집자이자 아키비스트(archivist·기록보관자)”라며 “그가 촬영하거나 수집한 사진자료는 개인의 기억에서 마을의 기억으로 그리고 동시대를 산 많은 사람들의 공통 기억으로 이어지는 기억 아카이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작가들의 응원, ‘서학동 언니 프로젝트’
김지연 관장은 매번 사진 작업을 할 때마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이번 ‘전주의 봄날’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십부터 25년 동안 다큐사진의 한길을 걸어왔다. 언젠가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뭐가 나온다고 이런 고생을 할까?’ 수십 번 반문을 했다고 한다. 결론은 DNA였다. 1950년대에 전 재산을 털어 광주시 남구에 진남중학교(4회 졸업생 배출)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다 파산해버린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릴 적 떠난 고향을 60여년 만에 찾아 ‘영산강’ 사진작업을 한 그는 “나에게 중요한 것은 강의 근원지와 종착지가 아니라 내가 살던 곳의 강물이었다”며 “영산강은 나의 사적인 연민과 회귀의 장소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서학동 사진미술관’의 행사 가운데 ‘서학동 언니 프로젝트’가 눈길을 끈다. 사진기획자들과 사진가, 후배 작가들이 ‘서학동 사진관’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연대와 응원 릴레이다. 1탄 ‘응달꽃은 짙다’(2015년 7월), 2탄 ‘Open-end(ed)’(2016년 5월), 3탄 ‘즐거운 일기’(2017년 6월), 4탄 ‘상춘(賞春)’(2018년 3월) 등 모두 4차례 진행됐다. 앞으로 작가는 어떤 사진 작업을 구상할까, 우문(愚問)을 던져본다.
“솔직히 거의 모든 작품을 할 때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애초부터 작가가 되려고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죠. 보통 작가들 같은 목적도 없었어요. ‘계남정미소’도, ‘서학동 사진관’도 무슨 목적 없이 했어요. 사실은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
/사진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