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세상에서 가장 좋은 노모(老母) 차-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3년 06월 26일(월) 00:00
집에 도착하니 집안이 고요하다.

도로를 지나 밭으로 가니, 멀리서 어머니보다 유모차가 먼저 나를 반긴다. 낡고 헤진 어머니 자가용, 유모차를 보고서 난 비로소 안심한다. 어머닌 옥수수밭 사이에서 무언가를 바지런히 움직이신다.

어머니!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다. 요즘 부쩍 청력이 떨어졌다. 가까이 가서 큰 소리로 부른다. 그때야 허리를 펴신다. 하던 일을 멈추고 논틀밭틀길을 따라 집으로 갈 때는 언제나처럼 유모차가 앞서고 엄마가 뒤를 따른다.

이 유모차는 첫 번째 자가용은 아니다. 처음에 형이 가져왔는데, 갑자기 굽은 허리를 쭉 펴시며 화를 내셨다. 아마 당신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게다. 게다가 운전까지 서투셔서 그다지 오래 쓰지 못했다. 두 번째는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법 오래 친하게 지내셨다. 지금 유모차 역시 중고차다. 제일 맘에 든다며 무척 좋아하셨다.

병원 가는 날이다. 일부러 난 서행하는데, 어머닌 자꾸 속도를 줄이라신다.

“이러니 사고가 나지! 내 차가 최고여, 과속하기를 해, 지름이 들기를 해”

웃음이 피식 나왔다.

“아들아, 이런 차는 무서워. 내 차가 백 번 천 번 좋지, 이게 뭐가 좋냐?”

언제 얼굴 한번 찡그린 적이 없던 분이 역정을 내니 다소 황당했다.

“뭐가 좋은데요?”

“뭐, … 내 차는 면허증이 필요하냐, 환경을 오염시키냐, 못 가는 곳이 있냐, 이만하면 최고지”

나는 허허 웃고 말았다. 하지만 안다. 어머니가 당신의 차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이유를,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음주 운행이 허용된 차라는 것을…

어머니는 마실 돌 때나 품앗이 갈 때 그리고 일하러 갈 때, 항상 유모차를 앞세운다. 무거운 짐도 들어주고, 길 안내도 하고, 유모차는 어머니의 든든한 발이다. 유모차에는 호미와 낫, 장갑과 사탕 없는 게 없다. 거기에 은밀히 감춰둔 막걸리 한 병까지, 어머니는 세상에 하나뿐인 자가용을 능숙하게 움직이고 일터로 행차하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난다. 유모차인지 어머니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 관절이나 낡은 유모차 매듭이나 낡은 건 마찬가지다.

유모차와 어머니는 다른 듯 무척 닮았다. 한 아이가 온전히 자라도록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다 고장 난 유모차나, 온몸 보살피지 않고 우리를 키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나, 같이 여기저기 고장이 났다. 그래서 자식보다 더 좋다던 어머니 말씀을 조금은 알겠다.

가다가 잠시 어머니가 유모차를 잡고 서 있다. 아니 유모차가 어머니를 붙들고 있다. 어머니도 저 유모차에 들어가 한 번쯤 쉬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도 어느 날 문득 어머니 젖을 빨던 그 시절로 회귀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유모차뿐이랴. 세상 모든 것은 유통 기간이 있다. 진짜 유통 기간이 있다면 그건 자동차나 통조림이 아니라 어머니일지 모른다. 너무 자주, 너무 오래 써서 이미 다 소진해버린….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불러낸 이름, 아플 때나 아쉬울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염치없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낸 이름, 게다가 고유 명사도 아닌 그 흔하디 흔한 보통 명사. 그런데도 신은 이 세상을 다 살필 수 없어 어머니를 보냈다고 했다.

그런 당신이 지금 고장이 나서 길에 멈추어 서 있다.

“이제 갈 데라곤 한 곳밖에 없다.”

어머니의 긴 한숨이 애처롭게 가슴을 파고든다.

유모차는 아니, 이젠 예를 갖춰 불러야겠다. 노모(老母) 차는 끝까지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다. 저 멀리 하현달이 길을 멈추고 어머니와 유모차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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