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
2023년 05월 21일(일) 18:45
철원 서쪽 395고지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내다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 중공군 3개 사단 격파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
군사 요충지 확보, 휴전회담서 유리한 위치 선점
드넓은 평야 철원지역 영유권 획득 결정적 역할

백마고지전투 승리 후 환호하는 국군 모습. <철원군청 제공>

1951년 5월16일부터 22일까지 인제군 현리에서 6·25전쟁기 중 국군의 가장 큰 패배로 일컬어지는 ‘현리전투’가 벌어졌다. 9사단을 포함한 우리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현리 전투에서 국군은 별다른 교전도 벌이지 못하고 와해되고 동부전선은 위기를 맞는다.

다음해인 1952년 10월초, 현리전투에서 중공군에 패했던 우리 국군은 철원 서쪽의 이름없는 395고지(백마고지)에서 또다시 중공군과 맞선다. 이 때 395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은 9사단. 하지만 395 고지의 9사단은 1년 전 중공군의 공격에 물러선 부대가 아니었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시종일관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고 결국 395고지에서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낸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국군과 유엔군은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또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드넓은 평야를 품은 철원지역 일대를 우리 땅으로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백마고지 전적지 내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백마상의 모습.


◇ 시작된 휴전회담 그리고 예고된 혈전=유엔군과 공산군은 6·25전쟁이 시작된 후 1년여 만인 1951년 7월부터 전쟁 휴전과 포로교환 등을 위한 회담을 시작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중공군이 주도하는 고지 쟁탈전이었다. 당시 고지 쟁탈전은 중공군이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한 고지를 먼저 공격해 차지하고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다시 되찾는 형태의 전투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1952년 가을께 포로문제에 대해 유엔군과 공산군의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한반도 중앙의 최고 요충지 ‘철의 삼각지대’로 관심이 집중됐다. 국군 9사단이 주둔 중인 395고지,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한반도 중부의 심장부인 이곳에서의 치열한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 철의 삼각지대=철원과 김화, 평강을 잇는 지리적 삼각지대를 ’철의 삼각지‘라 부른다. 이 지역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역시 원산으로 향하는 국도 5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로 지리적, 군사적으로 피아 간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중부 지역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다. 철의 삼각지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이는 곧 6·25전쟁 중 최대 혈전이 벌어지게 된 이유가 된다.

철의 삼각지는 평강으로 향할 수록 지대가 높아져 수비를 하는 국군과 유엔군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고 공세에 나서는 북한군과 중공군에 있어서는 유리한 지형이다. 이에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우세한 병력을 앞세워 군사·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철원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395고지를 노리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95고지를 비롯한 철원평야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9사단은 395고지 일대에 주둔해 중국군 3개 사단에 맞선다.

6·25전쟁 당시 철원 백마고지에서 한국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막았던 백마고지 전투의 모습. 1952년 10월 6~15일까지 백마고지(395고지)에서 한국군 제9사단 백마부대는 중공군 제38군 1만4,000여 명을 격퇴했다. 당시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산의 모습이 백마가 누운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됐다. <디지털철원문화대전 제공>


◇ 열흘 간의 격전,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6일 새벽, 395고지 주봉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6일부터 9일까지 9사단과 중공군은 주로 포격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유엔군에 비해 화력의 열세를 절감하면서 포병화력을 대대적으로 증강시킨 상태였다. 물론 유엔군에 비해서는 무기와 장비 등에서 열세를 보였지만 중공군의 화력 보강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분명 부담으로 다가왔다. 미군은 9사단이 지키고 있는 395고지 사수를 위해 항공기를 투입, 중공군 포병부대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실시했다. 인근 국군과 미군의 포병부대도 중공군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중공군도 9사단이 사수하고 있던 395고지 정상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하며 한편으로는 국군의 증원 및 군수지원 등을 방해하기 위해 395고지 북쪽에 위치한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국군의 후방에 위치한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7일부터 11일까지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과의 직접적인 전투, 즉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화력에 열세를 보이던 중공군은 야간에 공격을 감행해 9사단이 방어하는 395고지를 점령했고 밀려난 9사단은 신속하게 예비대를 동원, 반격에 나서 고지를 재탈환 하기를 반복했다. 395고지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총성과 포격이 멈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만큼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당시 9사단장 김종오 장군과 주요 지휘관들은 395고지 쟁탈전에서 적절한 시기에 강력한 예비대를 투입하는 등 효율적인 부대 운영과 작전을 펼쳤고 전체적으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395고지에서는 12차례의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고 7번이나 고지 주봉의 주인이 바뀌는 혈투가 벌어졌다.

11, 12일 이틀동안은 395고지 주봉을 차지한 9사단의 방어전이 진행됐다. 9사단의 계속된 방어에 중공군은 많은 병력을 잃었고 화력에서도 유엔군에 열세를 드러냈다. 결국 9사단은 395고지 북쪽의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면서 중공군을 완벽하게 몰아내는데 성공하며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를 만들었다.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벌어진 백마고지전투의 승리와 함께 9사단 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백마고지 전적비 모습. 백마고지전투에서 우리 국군 9사단은 3,500여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중공군은 1만 4,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름없던 395고지는 전투 이후 백마고지로 불렸고 이 고지를 끝내 사수한 9사단은 백마부대로 명명됐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 요인=9사단은 1951년 8월부터 8주동안 국군 사단 중 처음으로 미 제1군단이 주관한 FTC(the Field Training Center)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지휘관들의 부대 지휘역량이 크게 강화됐고 전투원들의 전투수행능력도 높아졌다. 또 사단 자체 교육훈련도 꾸준히 진행했다. 백마고지전투 승리는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 지원과 함께 9사단 지휘관들의 신속한 예비부대 투입 등 탁월한 부대지휘, 전투원들의 전투수행능력 등이 맞물리며 중공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 끝내 백마고지를 지켜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백마고지를 지켜내야 한다는 부대원들의 불굴의 투지도 한 몫한 결과였다.

◇ 집중된 화력과 병력 너무 컸던 피해=국군과 유엔군은 열흘 동안 이어진 395고지전투에서 무려 22만여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중공군도 5만5,000여발의 포탄을 395고지에 퍼붓는 등 피아간 총 28만여발의 포탄이 집중 사용됐다. 유엔군은 9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기를 750여회 출격시키는 등 395고지 사수에 집중했다. 치열한 백병전과 함께 수십만발의 포탄이 395고지를 타격하자 고지의 수목은 사라졌고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은 흡사 하얀 말이 누워있는 것 처럼 보였다. 이에 국군은 이때부터 395고지를 백마고지로, 9사단은 백마부대로 부르게 됐다. 당시 전투에서 9사단은 3,500여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중공군은 무려 1만4,0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백마고지 전투로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은 와해됐다.

백마고지 전적지 정상으로 향하는 길 위에 수십개의 태극기가 걸려있다. 백마고지전투 승리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호국영령들을 기억하는 길이기도 하다. <강원일보 제공>


◇기억해야 할 백마고지전투=휴전선 남쪽, 철원읍 산명리에는 백마고지전투를 기리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조성돼있다.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전적비와 충혼비, 위령비, 백마고지전투 현황 등이 기록된 기념관, 대형 태극기 계양대 등이 설치돼있다. 전적지에서는 서쪽으로 백마고지와 함께 드넓은 철원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은 관광객과 모내기에 나선 농부들, 불과 수㎞ 거리의 DMZ초소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평화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름없던 395고지에서 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우리 군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강원일보=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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