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오늘의 산책 - 김향남 수필가
2023년 05월 01일(월) 00:15 가가
출입문을 나와 막 계단을 내려서려던 참이었다. 바로 앞 화단 옆에 어떤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남자는 얼른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목 인사를 한 후 조심스레 돌아섰다.
뜬금없이 ‘구만이’ 생각이 났다. 그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불렸다. 키가 작고 얼굴이 불그스름했던 그도 언제나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공손하기까지 했다. 그의 깍듯한 인사는 당혹과 슬픔을 동시에 주었다. 세상은 신분의 고하로부터 해방된 지 오래건만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뱃사공이었고 고기잡이였다. 마을 앞에 강이 있었고 강에는 노를 젓는 배가 있었다. 그는 노를 저어 사람들을 건네주었다. 몇 년이 지나 노를 젓는 대신 줄을 매어 당기는 줄배로 바뀌면서 사공의 역할도 굳이 필요 없게 되었다. 줄을 당길 힘만 있다면 누구라도 배로 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강을 떠나지 않았다.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 일엽편주 나뭇잎 같은 배 위에 앉아 있으면 그대로 한 풍경이 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잡은 붕어며 잉어 등을 머리에 이고 장에 내다 팔았다.
그는 한동안 마을을 떠나 산 적도 있었다. 일찍 고향을 뜬 그의 아들을 따라 먼 타관으로 옮겨 갔으나 얼마지 않아 되돌아왔다. 그가 떠난 것은 그의 뜻이 아니라 그 아들의 원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자유를 원했다. 어떤 구속도 얽매임도 없는 곳으로 가서 오롯이 자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아들은 제 아버지에게도 그걸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대대로 이어져 온 고착을 끊어내지 못한 채 살던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술꾼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얻어 마신 술로 거나하게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는 우리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웬일인지 엄마는 그를 타박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챙겨주는 눈치기도 했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그는 “아~~ 신라”를 연거푸 부르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첫 소절만 있고 끝은 없었던, ‘신라의 달밤’은 그의 유일한 노래였다.
그는 그곳에서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술에 취해 꼬랑창에 빠지기도 하고 신발이 벗겨진 채 갈지자로 걷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눈 한번 부릅떠 본 적 없는 공손한 삶이었다. 그가 살던 집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덩그렇게 남았다가 그조차도 흔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찌그덩찌그덩 노 젓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시절의 이야기가 새삼 또록또록해지는 것은 왜일까? 벌써 반백 년도 넘은 일이거니와 기억의 지층에서도 맨 아랫자리로 밀려난 이야기가 아닌가. 아마도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도 가는 듯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흘러서 가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는 것이어서, 때때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누구는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책임을 묻고 무릎을 꿇리는 것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지만, 내 어린 날의 가장 먼 기억도 이렇게 생생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싶어진다. 100년이 지났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흔적도 없이 잊히는 것도 아니다. 100년이나 50년이나 있었던 일은 있었던 것이며, 기억의 층위에서라면 다를 바가 더욱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파트 주변을 맴돌았을 뿐인데 오늘의 산책은 꽤 멀리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저 옛날의 ‘구만이’를 만나고,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며 거기 실린 노랫소리까지 다 들은 것이니 산책을 나와서 문득 과거와 마주친 것이다. 아직 반상(班常)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는 않았던 시절의 한 시골 사람 이야기다.
타임머신을 탄 듯 문득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찾아온 이야기에 마음이 짠해져 온다. 그 사람이라고 어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없었을까만, 어쩌지 못한 채 술로 달래 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의 자유이고 해방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울도 담도 없는 시간의 경계에서 깜짝 등장한 그를 만났다. 길 잃은 듯 비틀거리던 그의 모습이 오늘의 산책을 휘적휘적 따라온다.
뜬금없이 ‘구만이’ 생각이 났다. 그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불렸다. 키가 작고 얼굴이 불그스름했던 그도 언제나 조심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공손하기까지 했다. 그의 깍듯한 인사는 당혹과 슬픔을 동시에 주었다. 세상은 신분의 고하로부터 해방된 지 오래건만 그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술에 취해 꼬랑창에 빠지기도 하고 신발이 벗겨진 채 갈지자로 걷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눈 한번 부릅떠 본 적 없는 공손한 삶이었다. 그가 살던 집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덩그렇게 남았다가 그조차도 흔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찌그덩찌그덩 노 젓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시절의 이야기가 새삼 또록또록해지는 것은 왜일까? 벌써 반백 년도 넘은 일이거니와 기억의 지층에서도 맨 아랫자리로 밀려난 이야기가 아닌가. 아마도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도 가는 듯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흘러서 가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되돌아오기도 하는 것이어서, 때때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누구는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책임을 묻고 무릎을 꿇리는 것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지만, 내 어린 날의 가장 먼 기억도 이렇게 생생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싶어진다. 100년이 지났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흔적도 없이 잊히는 것도 아니다. 100년이나 50년이나 있었던 일은 있었던 것이며, 기억의 층위에서라면 다를 바가 더욱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파트 주변을 맴돌았을 뿐인데 오늘의 산책은 꽤 멀리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저 옛날의 ‘구만이’를 만나고,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며 거기 실린 노랫소리까지 다 들은 것이니 산책을 나와서 문득 과거와 마주친 것이다. 아직 반상(班常)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는 않았던 시절의 한 시골 사람 이야기다.
타임머신을 탄 듯 문득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찾아온 이야기에 마음이 짠해져 온다. 그 사람이라고 어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없었을까만, 어쩌지 못한 채 술로 달래 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의 자유이고 해방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울도 담도 없는 시간의 경계에서 깜짝 등장한 그를 만났다. 길 잃은 듯 비틀거리던 그의 모습이 오늘의 산책을 휘적휘적 따라온다.